[모던 경성]홍난파는 왜 원고를 불살라버렸을까
◇”네가 불세출의 대천재라고?”
“너는 음악이나 하면 했지, 주저넘게 소설은 다 무엇이야, 그래 개천지(開天地) 통만고(通萬古)해서 두가지 예술에 대성한 천재가 누구란 말이냐?”
스물 대여섯살 난파(蘭坡) 홍영후(1898~1941)가 설날 무렵 문인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가 얼굴에 찬물을 뒤집어쓰는 듯한 수모를 당했다. 권커니 잣거니 순배가 돌다가 취기가 오른 끝에 동갑내기 친구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가 핏대를 올리며 도발한 것이다.
불의의 습격에 허를 찔린 난파가 반론을 폈다. “왜 없니? 바그너도 모르니? 시인이요, 음악가인 바그너 말이다.” 수주가 질 리 없었다. “장하다! 그래 네가 그런 불세출의 대천재란 말이지?”
◇'수주의 뻔취에 감사’
설전은 멈췄다. 애초 술자리 농담삼아 시작한 얘기니 심각할 것도 없었다. 수주 변영로는 술때문에 빚은 소동을 책(명정 40년)으로 묶어 낼 만큼, 수많은 일화를 남긴 호주가였다. 수주가 가족을 거느린 난파의 집에서 대취해 망신을 당한 일도 ‘명정 40년’에 나온다. 난파도 이런 수주의 술버릇을 잘 알기에 그러려니 흘려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친구의 일격이 아팠던 모양이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일어나선 출판을 준비하던 창작집 ‘분화구 上에서’ 원고뭉치를 불살라버렸다. 그리곤 문학 쪽은 거들떠보지 않고, 음악의 길만 걸었다. 난파가 마흔 무렵에 쓴 에세이 ‘분서의 이유’(‘박문’8, 1939.6)에 나오는 내용이다. 십수년전 술자리 에피소드를 세밀하게 복기할 만큼, 난파에게 그날의 충격은 컸던 것같다.
난파는 ‘분서를 하고 붓을 꺾지 않았든들 사십평생에 일대의 걸작은 못낳았다 손치고라도 음악가로서의 나의 무재무위한 편보다는, 좀 더 나은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하는 원망을 남겼다. 하지만 ‘수주의 뻔취(펀치)에 아무 통양(痛痒)도 느끼지 않는 반면, 저윽이 감사와 고소를 불금한다’고 마무리했다.
실제로 난파는 1924년 마지막 번역서(에밀 졸라 ‘나나’)를 냈고 1926년 잡지 ‘청년’에 톨스토이 단편 ‘다복한 사형수’를 실은 이후, 음악에만 전념했다.
◇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 위고, 졸라 대표작 번역
홍난파가 ‘1920년대 최대의 전문 번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난파는 중장편 9편을 번역해 단행본으로 냈고, 단편 소설 2편을 번역해 잡지에 연재했다.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를 쓴 김병철 교수는 난파를 김억과 더불어 1920년대 최대 번역가로 꼽았다. ‘그가 번역한 9편의 작품은 일역(日譯)의 중역(重譯)이긴 하지만, 그 모두가 세계 명작에 드는 작품들’이라면서 난파의 작품 선정 안목을 높이 평가한다. 번역집 목록을 보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하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1921.4), 190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시엔키에비치 소설 ‘어디로 가나’(1921.11),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축약한 ‘애사’(1922,6)와 ‘장 발장의 설움’(1923,2), 뮈세의 장편소설 ‘세기병자의 고백’을 번역한 ‘사랑의 눈물’(1922,11), 독일 극작가 헤르만 주더만의 대표작 ‘매국노의 자’(1923,3),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1846)을 옮긴 ‘청춘의 사랑’(1923,6), 에밀 졸라의 ‘나나’(1924.6)이다. 여기에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옮긴 ‘청년입지편’(1923.1)까지 추가된다.
‘어디로 가나’는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 ‘쿠오 바디스’를 우리 말로 옮긴 제목이다. 스마일스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으로 유명한 영국 사회운동가다.
◇일제하 유일한 도스토옙스키 소설집 번역
난파가 번역한 ‘청춘의 사랑’은 일제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소설이다. 동경음악학교 예과에 다니던 난파는 1919년2월 자신이 주관한 유학생잡지 ‘삼광’에 ‘사랑하는 벗에게’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가 잡지가 폐간되면서 연재를 멈췄다.1923년 ‘청춘의 사랑’으로 제목을 바꿔달고 출간했다.
출판 준비 중이던 원고도 있었다. 1923년 ‘세계문호단편집’ 광고가 실렸는데, 이 원고로 추정되는 난파의 육필 ‘다복한 사형수’가 단국대 ‘난파 홍영후 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여기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 오스트리아, 스웨덴 단편소설 11편이 실려있다. 근대문학번역사 전공 윤경애 영남대 일문과 외래교수는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다섯 권밖에 출판되지 못한 단편소설 번역집의 번역사 안에서 가장 다양한 작가의 대표작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번역집’이라며 이 책이 출간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홍난파의 번역은 물론 원전이나 영어본이 아니라 당시 일본 유학생에게 익숙한 일본어 번역본이 저본이다. 비록 일본어 저본을 중역했으나, ‘문장과 단락, 내용의 전달과 표현에서 큰 차이가 없는 축자역의 솜씨를 보여, 홍난파의 번역이 저본에 매우 충실하였음을 확인할 수있다’고도 했다.
◇'서툰 감상주의와 아마추어리즘’
난파는 직접 소설도 썼다.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을 묶은 장편 ‘허영’(1922)과 ‘최후의 악수’(1922), 창작집 ‘향일초’(1923) 3종을 냈는데, 문학적으론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허영’과 ‘최후의 악수’는 메이지시대 일본의 인기 가정 소설을 번안한 작품이다.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는 ‘홍난파 소설이 서툰 감상주의와 아마추어리즘을 넘어서지 못한 수준에 머물렀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창작집 4권 출간을 동시에 추진한 난파의 패기와 열정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고도 했다.
◇연악회 결성, 한국인 첫 바이올린 독주회, 작곡...왕성한 음악 활동
난파의 외국 문학 번역이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작업을 음악 활동을 하면서 병행했다는 사실이다. 1916년 ‘악전대요’을 시작으로, ‘창가집’, ‘악보집’ 등 음악책 13종 15권(출간 예고 포함)을 낸 것도 이즈음이다.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재학(1918년4월~1919년6월)하면서 1919년2월 예술종합잡지 ‘삼광’(통권3호)을 발간했다. 1922년 음악연구기관 연악회(硏樂會)를 만들어 연주를 다녔고 1924년 1월19일 한국인 첫 바이올린 독주회(‘바이오링 홍영후씨 독주회’, 조선일보 1924년1월18일)를 종로 청년회관에서 열었다. 한국인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가로서의 활약만 해도 눈부신데, 번역가로서의 활동은 힘에 부칠 만하다.
난파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으로 가르치던 1931년에도 이런 글을 남겼다. ‘소설 깨나 쓰던 것을 한꺼번에 불살러버리고 일어서지만 안했더라도 그동안에 세계적 작품까지는 몰라도 조선적 작품 한 편쯤이야 쓰지못했으리라고 뉘 감히 단언할까 보냐’(‘유모레스크’上, 조선일보 1931년 2월20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참고자료
홍난파, 焚書의 이유, 박문 8, 1939.6
박진영, 홍난파와 번역가의 탄생, 코기토 70, 2011.8
윤경애, 홍난파의 쿠오바디스 번역 양상과 번역의 계보 고찰, 번역학연구 제20권2호, 2019 여름호
윤경애, 홍난파의 미발표 단편소설 번역집 ‘다복한 사형수’의 번역 계보 및 번역사적 의의 고찰, 번역학연구 제21권2호, 2020 여름호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 을유문화사, 1975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박성한 역전적시타… 한국, 프리미어12 도미니카에 9대6 역전승
- “한국에서 살래요” OECD 이민증가율 2위, 그 이유는
- 연세대, ‘문제 유출 논술 합격자 발표 중지’ 가처분 결정에 이의신청
- ‘정답소녀’ 김수정,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서명…연예인 첫 공개 지지
- “이 음악 찾는데 두 달 걸렸다” 오징어게임 OST로 2등 거머쥔 피겨 선수
- “이재명 구속” vs “윤석열 퇴진”… 주말 도심서 집회로 맞붙은 보수단체·야당
- 수능 포기한 18살 소녀, 아픈 아빠 곁에서 지켜낸 희망
- 이재명 “우리가 세상 주인, 난 안 죽어”… 野, 집회서 날선 판결 비판
- [단독] ‘동물학대’ 20만 유튜버, 아내 폭행하고 불법촬영한 혐의로 입건
- [단독] ‘제주 불법 숙박업’ 송치된 문다혜, 내일 서울 불법 숙박업 혐의도 소환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