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윤회의 참나무통’... 1924 버번 배럴 에이지드 까베르네 소비뇽

유진우 기자 2023. 7. 1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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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는 와인을 만나 성숙한다.

갓 증류를 마친 위스키 원액은 투명하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향을 빼면 밋밋한 곡물향 밖에 나지 않는다. 위스키가 다양한 향과 맛을 품는 건 오랜 숙성 덕분이다. 원액을 참나무통에서 숙성하면 점차 맛과 향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위스키 종주국 스코틀랜드에서는 원액을 숙성한 지 최소 3년은 지나야 ‘위스키’라는 이름을 붙일 자격이 생긴다.

위스키 숙성에는 스페인 와인 쉐리(Sherry)나 포르투갈 와인 포트(Port)를 담았던 참나무통을 자주 쓴다. 와인을 담아두던 참나무통에서 원액을 익히면, 평범한 참나무통에서 숙성할 때보다 복합적이고 미묘한 개성을 심을 수 있다.

투명했던 원액은 수년 동안 쉐리와 포트가 머물던 참나무통에서 지내면서 그 맛과 향이 켜켜이 덧씌워진다. 숙성은 위스키 성격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과정이다. 증류소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숙성에 쓸 참나무통을 엄선한다. 얼마나 이름 난 와이너리에서 사용했던 참나무통인지, 어느 국가에서 어떤 지역 나무로 누가 만들었는지 여부까지 따져 고른다.

이렇게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각 증류소마다 다른 특이한 위스키 풍미가 생겨난다. 브라이언 킨즈맨 윌리엄그랜트선즈 마스터 블렌더는 저서에서 “위스키 풍미를 결정짓는 과정에서 최초 3년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 기간 원액에 다양한 특성이 급속히 입혀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쉐리 와인을 담았던 참나무통에서 익힌 위스키는 말린 과일과 고소한 견과류 풍미가 강하게 난다. 디저트 와인으로 유명한 포트 와인 참나무통에서 숙성하면 달콤한 벌꿀과 화사한 꽃향기가 주로 나타난다.

최근에는 쉐리나 포트가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마시는 와인을 담았던 참나무통에 위스키를 숙성하는 생산자가 늘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와인을 만들 때 쓰인 참나무통에서 신분 상승을 노리는 위스키도 나타났다.

그래픽=정서희

반대로 위스키를 담았던 참나무통에서 숙성하는 와인도 있다. ‘1924 버번 배럴 에이지드 카베르네 소비뇽’이 대표적이다. 이 와인은 미국 켄터키 버번 위스키를 숙성했던 참나무통을 사용해 만든다.

버번 위스키는 미국을 상징하는 술이다. 스카치 위스키가 그렇듯, 버번이란 이름 역시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이 이름을 쓰려면 엄격한 기준을 모두 지켜야 한다. 당연히 미국에서 만들어야 하고, 증류 원재료 가운데 최소 51% 이상 옥수수를 써야 한다.

숙성은 반드시 내부를 불에 그을린 새 참나무통에서 해야 한다. 한번 사용했던 참나무통을 다시 쓰면 버번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 조항 때문에 미국 위스키 생산자들은 한번 사용한 버번 위스키 참나무통을 스코틀랜드로 보냈다.

옥수수를 쓰는 버번 위스키는 보리를 사용한 스카치 위스키보다 바닐라향과 카라멜 같은 단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스코틀랜드보다 뜨거운 미국 내륙 기후 특성상 증발하는 원액 양이 많아 맛도 진하다. 스카치 위스키 생산자들은 버번 위스키 숙성 참나무통을 들여와 진한 여운과 달콤함을 더했다.

일부 미국 와인 생산자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와인을 버번 위스키 숙성 참나무통에서 숙성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위스키가 와인을 숙성했던 참나무통을 만나 새 개성을 띌 수 있다면, 와인 역시 위스키를 숙성했던 참나무통에 익히면 이전과 다른 맛과 향을 뿜지 않겠냐는 질문이다.

1924 버번 배럴 에이지드 카베르네 소비뇽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 와인은 미국 거대 와인기업 델리카토 와이너리에서 만든다. 델리카토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인델리카토(Indelicato) 가문이 미국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 설립했다. 와인 앞에 붙은 1924는 델리카토 와인을 세운 해다.

이들은 와인을 위스키 숙성 참나무통에서 익히는 과정을 단순히 풍미를 더하기 위한 단순한 공정으로 보지 않는다. 윤회(輪廻) 혹은 삶의 순환(circle of life)에 비교한다.

막 만들어져 와인을 숙성했던 참나무통이 역할을 다하면 곧 위스키가 새로 담긴다. 이렇게 위스키와 수년을 함께 한 참나무통에서 위스키가 빠져나가면, 이 자리에는 다시 와인이 담긴다. 이 순환 과정에서 와인 향을 띈 위스키와 위스키 향을 머금은 와인이 생겨난다. 참나무통에도 와인 향과 위스키 향이 겹겹이 쌓인다.

1924 버번 배럴 에이지드 카베르네 소비뇽은 프랑스산 참나무통에서 먼저 9개월을 숙성한다. 그 후 버번 위스키를 담았던 미국산 참나무통에서 2개월을 더 익힌다. 두 참나무통을 거치는 과정에서 와인에는 달콤하고 진득한 버번 위스키를 한 숟가락 더한 풍미가 배어든다.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레드 와인 신대륙 6만원 이상 10만원 미만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에선 레뱅이 수입·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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