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조각 거장’ 권진규 작품, 50년 지켜 안식처 찾아준 조카

허윤희 기자 2023. 7. 1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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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관 만든 외조카 허경회씨
서울 남현동 남서울미술관 1층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장에서 만난 권진규의 조카 허경회씨는 "이 작은 불상 조각이 제일 마음에 든다"며 작품 앞에 앉았다. /박상훈 기자

“권진규 아틀리에가 있는 서울 동선동에서 남서울미술관까지 지하철로 50분 거리인데, 여기까지 오는 데 50년이 걸렸습니다.”

한국 근현대 조각의 거장 권진규(1922~1973)가 서울 관악구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남현동 남서울미술관 1층에 최근 개관한 ‘권진규의 영원한 집’. 지난 2021년 유족들이 50년간 지켜온 권진규 작품 141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후 이를 상설 전시하는 공간이 문을 연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권진규의 조카 허경회(69)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는 “어머니의 소원이 드디어 풀렸다”며 벅찬 표정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제야 인생 숙제를 해결한 것 같아 감개무량합니다. 권진규 작품이 한곳에서 안정적으로 소개되고 연구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니까요.”

생전 서울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작업하고 있는 조각가 권진규. /권진규기념사업회

허 대표는 권진규의 여동생 권경숙의 아들 4형제 중 둘째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0대학교에서 경제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작가의 생애 마지막 4년을 동선동 집에서 함께 살았다. 지난해 외삼촌의 삶과 작품을 정리한 평전 ‘권진규’를 냈다. “사실 삼촌의 예술적 감성을 가장 많이 닮은 조카는 동생(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이에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여 삼촌에게 미술 수업을 받았지요. 1973년 삼촌이 세상을 떠난 후 한동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미술 대신 수학의 세계에 빠졌어요.” 허명회 교수의 아들이 지난해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다. 허준이 교수는 수학을 공부하는 원동력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허 대표는 “조각가와 수학자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권진규, '춤추는 뱃사람', 1965, 테라코타에 채색, 58×79×7cm. /권진규기념사업회

유족들은 작가 사후 권진규미술관 건립을 추진해 왔으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미술관을 짓겠다는 약속을 받고 권진규가 고등학교를 다닌 춘천의 지역 기업에 작품들을 일괄 양도했다. 하지만 미술관 건립은커녕 작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작품이 대부업체 창고에 방치됐고, 결국 소송 끝에 작품을 되찾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어머니 집을 팔고, 형제들과 아내 돈까지 탈탈 털어서 천신만고 끝에 작품을 회수해 올 수 있었다”며 “소설 ‘별주부전’에서 용궁까지 갔다 온 토끼의 심정”이라고 했다.

서울 남현동 남서울미술관 1층 '권진규의 영원한 집' 전시장 모습. /서울시립미술관

사람들은 권진규를 ‘비운의 천재 조각가’라 부른다. 허 대표는 “외삼촌이 사후에 복이 아주 많은 것 같다”며 “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제 영원한 집을 찾게 됐으니 ‘비운의 작가’라는 타이틀은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천재였나?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발함, 번득임, 날렵함, 귀기 서림…. 이런 걸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천재라면 근대 거장들 중엔 이중섭이 가장 천재에 가깝죠. 삼촌에게서 그런 것들을 크게 느끼진 못했어요. 대신 묵직함을 느꼈지요.”

그는 “외삼촌은 과묵했던 사람”이라며 “말이 없었지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모든 에너지를 오로지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 썼다. 묵직한 입과 행동으로 한길을 간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를 ‘장이’라고 했어요. 나는 조각가가 아니라 장인이라고. 자신이 지닌 장인의 손을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자랑스러워했던 사람입니다.”

권진규가 첫사랑이자 아내였던 일본인 오기노 도모를 모델로 만든 '도모'. 1951, 테라코타에 채색, 25×17×23cm.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의 가장 중요한 첫 모델은 첫사랑이자 아내였던 일본인 오기노 도모였다. 유학 시절 만난 그녀를 모델로 1951년 제작한 첫 작품 ‘도모’를 상설전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권진규는 1959년 홀로 귀국했고, 이후 그녀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의 조각엔 왜 유독 말[馬]이 많을까. 허 대표는 “인간에게 말은 전쟁터에도 함께 나갈 정도로 배반하지 않고, 빨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동물 아니냐”며 “권진규에게 아주 매력적인 동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권진규, '마두 B'. 1953, 안산암, 30×70×18cm. /권진규기념사업회

남서울미술관은 대한제국 시절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된 건물로 층고가 높은 고풍스러운 공간이다. 그는 “상설관을 1층만 해달라는 게 제 조건이었다”며 “2층엔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전시가 열리길 바란다. 동시대 작가들과 함께해야 권진규가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는 허 대표(2, 4주)와 동생 허명회 교수(1, 3주)가 진행하는 특별 도슨트(전시 해설) 프로그램 ‘나의 외삼촌, 권진규’가 연말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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