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제국 전성기… 빅토리아 리더십의 원천은 ‘꾸밈없는 솔직함’

유석재 기자 2023. 7.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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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원서 제목은 ‘Queen Victoria’
남편 앨버트公 등 주변인 중심으로 여왕의 일생 재구성한 전기문학

여왕이 사랑한 사람들

리턴 스트레이치 지음 |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 404쪽 | 2만원

19세기 제국주의의 영화(榮華)가 정점에 올랐던 시대, 지금도 회자되는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다. 영국의 식민지가 지구 곳곳에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 시기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 동안 왕좌에 있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와 겹친다. ‘빅토리아 시대’라는 것은 영국의 힘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대이면서, 영국이 정치와 경제, 문학과 언어, 과학·인문학·산업·패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표준처럼 자리 잡았던 시대였다. 거기에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던 여왕의 리더십이 있었다.

이 책(원제 ‘Queen Victoria’)은 1921년에 나온 전기 문학이다. 국내 번역본 제목 때문에 치정을 주로 다룬 책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포괄적인 평전이다. 반전 운동으로 투옥된 버트런드 러셀이 ‘읽다가 너무 크게 웃는 바람에 교도관한테 혼쭐이 났다’고 술회할 만큼 흥미롭게 서술됐다. 찬사와 추념과 업적 나열로 가득한 기존의 전기가 아니라 꾸밈을 거부하고 인물의 새로운 면모를 발굴해내는 방식 때문에 ‘저자인 리턴 스트레이치(1880~1932) 이후 전기문학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평까지 나왔다.

아무리 여왕이 승하한 지 20년이 지난 시점이라 하더라도 이런 묘사는 독자를 당혹하게 만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왕의 눈이 아무리 참담해도 입보다는 덜했다. 작고 툭 튀어나온 치아와 후퇴한 턱에 고인 아집은 그 어떤 강인한 턱이 예고하는 것보다 더한 낭패감을 줬다. 군주의 옹고집은 일반인과 차원이 다른 법이다.”

독일 출신 궁정 화가 프란츠 빈터할터가 1846년 그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전기 작가 리턴 스트레이치는 빅토리아 여왕 64년 치세의 원천이 '솔직한 리더십'이었다고 말한다. /Royal Collection Trust

이 책은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과 남편 앨버트 공, 정치가 글래드스턴 등 여왕이 사랑하고 증오했던 일곱 명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일생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 있었던 여왕은 정작 무척 고집이 세고 보수적인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존경을 받았지만 사실은 실권이 빈약했고, 궁전에 걸린 장엄한 초상화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는 대신 촐싹대는 걸음걸이로 끊임없이 종종거리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 참정권이 화두로 떠올랐을 때 ‘여왕’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그 말만 들어도 머리에 피가 쏠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했다. “여성의 권리라는 사악하고 터무니없는 주장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공포를 저지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도대체 이런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도 오래 대제국의 여왕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리더십인가? 바로 솔직함이었다.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감정 표현이 흘러넘치는 편지, 진부한 어법, 단순한 문체로 쓰여진 대국민 메시지를 본 영국 국민들은 이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여왕께서 실제로 우리와 아주 비슷하구나!” 국민들은 본능적으로 빅토리아의 거부할 수 없는 진실성을 느끼고 반응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여왕의 사랑스러운 특징이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활기와 성실성, 자부심과 소박함이 마지막 순간까지 여왕과 함께했다.

남편 앨버트 공과 부부 싸움을 한 뒤 남편이 방을 잠그고 나오지 않자 “영국 여왕이오”라며 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었는데 “당신 아내예요”라고 하니 문이 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이 책에 나온다. 하지만 이 얘기는 사실 누군가 지어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독자 입장에선 이런 생각이 떠오를 만도 하다. 버킹엄과 윈저 궁 담장 뒤에 숨어서 고결함과 권위만 내세웠더라면 생겨날 수 없는 일화가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유별날 정도로 정직했던 빅토리아는 사랑과 증오, 애달픔과 군주로서의 자부, 때론 이해 불가능한 고집까지도 낱낱이 바깥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그녀는 새로운 시대의 화신이었다”고 말한다. 과거 왕실의 냉소주의와 미묘함이 사라졌고, 의무와 근면, 도덕, 가정의 가치가 승리를 거뒀다. 여왕의 친숙한 모습은 대중의 상상 속에 확연히 각인됐다. 이로써 빅토리아 시대가 활짝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군주정과 전제정을 구별하며 ‘군주정은 명예로 유지되지만 전제정은 공포로 유지된다’고 말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리더십에는 공포를 유지하기 위한 장막이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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