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다른 소리를 위한 장소들
다른 나라의 대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 반은 호기심, 반은 의무감에 어떤 장소들을 찾아보곤 한다. 음악을 듣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까 공연장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위한 장소들을 찾는 것이다. 잘 모르는 곳에 간다면 검색어는 큼지막한 것부터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밀라노 공연장’ ‘일본 오사카 콘서트홀’ 같은 말들. 이렇게 검색했을 때 상단에 나오는 결과는 대체로 나라의 지원으로 건설된 공연장으로, 보통은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데다 교통의 요지에 있고, 건물 전체를 사용한다. 이런 곳에서 내가 들을 수 있던 음악은 큰 후원단체를 확보하고 수많은 인프라가 관여해 만들어지는, ‘고전’이라 불리는 서양음악이었다.
서양 고전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도시마다 다르므로 이런 공연을 보는 일도 무척 즐거웠지만, 어느 순간 덜 안정화된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공통관습으로 묶이지 않는 데다 아티스트의 손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날것의 음악들. 그즈음부터는 검색어도 바뀌었다. ‘태국 방콕 실험음악’ ‘미국 뉴욕 즉흥/노이즈’ ‘네덜란드 로테르담 언더그라운드 음악’ 같은 말들. 이들은 대체로 지하에 자리하거나 건물의 로비를 공연장으로 바꾸어 사용했고, 운 좋게도 오랜 시간 공간을 야금야금 확장해온 경우엔 여러 건물의 부분들을 이어 땅굴 같은 공간을 만들어두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내가 만난 음악은 다른 도시에서 만날 수 없는 시끌시끌하고 낯선, 음악에 대한 생각을 점검하게 만드는 음악이었다. 어디에서나 공연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장소였기 때문에 비로소 확성될 수 있는 음악인 것 같았고, 그런 작은 공간들에서 나는 그 지역의 음악가 개개인들이 만드는 고유한 음악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운 좋게도 내가 사는 도시 서울에도 그런 음악 공간들이 곳곳에 있었다. 즉흥/실험음악을 위한 공간을 꾸준히 열어두고 있는 닻올림과 게토얼라이브, 전자음악가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인이 오가던 무대륙 등.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음악가 개개인이 모일 수 있는 느슨한 중심지들로 자리해 왔다.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곳들도 있다. 동시대 실험음악과 예술 서적을 큐레이션해 소개하는 서적/음반 전문점이자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는 서울 마포구의 로프 에디션스는 얼마 전 3주년을 맞았고, 하드한 음악을 틀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충무로의 ACS, 즉흥음악가들과 서양음악, 한국음악을 모두 유연하게 다루는 음악가들이 모여드는 동작구의 중력장 등이 그런 예다.
꽤 오랫동안 운영해온 공간들 외에, 새로 문을 연 공간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이전에는 잘 모르던 것들을 발견하게 됐다. 어딘가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그런지 그동안 잘 보지 못했지만 이런 구체적인 장소가 생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장소를 찾아온 이들이 만나고 충돌하자 금방 또 새로운 흐름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그런 장면들을 보며 음반 중심의 문화가 강해질수록 장소의 중요성이 흐려지는 것만 같았지만, 여전히 음악을 위한 장소가 곳곳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했다.
결코 하나의 가치로 묶일 수 없는 데다가 매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하는 그 음악의 현장에서 나는 이상하고도 즐거운 너그러움을 느낀다. 이런 장소에서 만날 수 있는 음악을 한마디로 딱 잘라 형용하기는 어렵다. 그건 불안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려는 힘들, 깜깜한 곳에서 헤매는 움직임, 안정보다는 불균형한 것들, 작거나 아주 크거나, 너무 느리거나 빠르거나, 조금 이상하거나 혼란스러운 어떤 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곳에서 항의를 받고 사라지거나 다른 소리 뒤에 가려졌을 수도 있는 음악들이지만, 다른 소리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들은 그 음악을 태연히, 그리고 소중히 받아들인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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