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한여름 더위 식혀주던 수박

2023. 7. 15.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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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모자, 전북 부안, 1973년, ⓒ김녕만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 전진할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수박모자 뒤집어쓰고 커다란 숟가락을 꽉 움켜쥔 아이는 망설인다. 이대로 돌진하여 한입 빼앗아 먹어버릴까, 아니면 계속 애원하는 표정으로 형의 측은지심에 기대어 형이 베푸는 선심을 기다려야 할까? 그러나 우격다짐으로 형을 이길 자신은 없고, 아예 동생과 눈을 맞추려 하지 않는 눈치 빠른 형에게서 연민을 끌어낼 가능성 또한 작아 보인다. 진퇴양난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에 수박은 최고의 먹거리였다. 냉장고가 없던 때라서 어머니는 차가운 우물물에 수박을 담가 놓으셨다. 그러면 아이들은 우물가를 빙빙 돌다가 수박이 잘 익었나 보려고 삼각형으로 딴 꼭지 부분을 재빨리 뽑아 속을 베어 먹고 얼른 뚜껑을 덮곤 했는데 그 달곰한 맛에 더욱 안달이 났다. 이윽고 어머니가 양은쟁반에 올려놓은 수박을 커다란 식칼로 자를 때 칼만 대도 저 스스로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쫙 벌어지던 새빨간 속살에 기웃거리던 무더위는 저만치 달아났다.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어, 이거 나네? 내가 왜 여기 있지?”라고 농담을 던지는 건 어렸을 적 한두 번쯤은 수박모자를 써본 경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수박 한 통을 나눠 먹을 식구가 너무 많아서 모두 자신의 몫이 부족했고, 그래서 자꾸 깊게 파먹다 보면 수박껍질에 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그 아쉬움이 수박모자가 되었다. 바닷가에서 만난 이 수박모자 아이는 과연 수박 한 숟가락을 더 먹을 수 있었을까?

초복을 지나 중복을 향해 간다. 달고 시원한 수박의 계절이다. 그런데 가난한 세월을 넘어선 지금도 선뜻 수박 한 통 사기가 버겁다. 이번에는 예전과 반대로 수박 한 통을 단숨에 먹어치울 식구가 없는 탓이다. 그러니 시장에서는 4분의 1로 쪼갠 수박을 포장해서 팔기도 한다. 인구절벽을 걱정하는 시대에 먹을 사람은 많고 수박이 모자랐던 그 시절을 떠올려 본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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