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상권 침략에 맞서, 조선 상인들 광장시장 세웠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한국 첫 근대적 상설시장
1905년 구한말 일본인들이 남대문시장 경영권을 장악한 뒤 상권을 종로 쪽으로 넓혀오자 조선 상인들과 고종이 조선의 자본으로 이 시장을 세웠다. 공식 명칭은 ‘동대문시장’이었고, 청계천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자리를 튼 까닭에 광장시장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 종로는 시장의 거리였다. 지금의 종각에서 관철동 구간에는 작은 행랑채 모양의 점포가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모두 881간(間)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시전(市廛) 또는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렸던 어용(御用)의 상인 그룹이다. 궁궐을 비롯한 관아에 물건을 공급하던 상인들이다. 정부에서 정식 영업 허가를 받은 이들은 정부 허가를 거치지 않은 가게, 즉 난전(亂廛)을 단속할 권한이 있었다. 이른바 금란전권(禁亂廛權)이다. 나름 위세를 떨치던 집단이었다.
개항 이후 밀물처럼 밀려오는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을 지켜보며 이들도 적극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외세가 조선의 상권을 모두 잠식하는 상황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종로거리에 광장시장이 정식 자리를 잡은 이유와 같다.
전통 물품 대신 수입 잡화상 들어서
이에 따라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에 새로운 상점, 회사들이 들어섰다. 1897년 광교 옆 대한천일은행 사옥을 비롯해 각종 회사, 상회가 종로 길가에 등장했다. 1899년에는 옷감을 파는 의전(衣廛) 도가에 피물회사(皮物會社), 명함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종로개문사(鐘路開文社), 약재를 취급하는 약재회사(藥材會社) 및 종로의약회사 등이 점포를 냈다. 1900년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약재상인 제생사(濟生社)가 종로에 들어섰다. 같은 해 백목전 상인들이 직조단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백목전 도가에 공장을 설치했다.
그러나 종로 상권의 자주적 근대화는 1905년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단행한 화폐개혁과 재정개혁으로 큰 피해를 본다. 화폐개혁과 한전(韓錢) 어음 폐지는 아무런 유예조치 없이 단행됨으로써 조선사회에 ‘전황(錢荒)’을 야기했다. 메가타 개혁 이후 일본 상인들이 통감부로부터 각종 관급(官給) 물자의 조달을 청부받으면서 종로 시전 상인들의 관청 공납도 끊겼다. 반면 일본 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융자받은 일본 상권은 급속히 뻗어나갔다.
메가타 개혁 이후 종로 시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시전(市廛) 형태였던 점포는 주단포목상, 양화점, 잡화상, 양복점, 권연(卷煙)제조소 등으로 변신했다. 아울러 규모가 큰 시전들은 ‘회사’라는 형식으로 갈아탔다. 서구의 회사제도와 자본주의 경제사상이 유입되면서 민간인 다수가 자본을 모으는 중인합자(衆人合資)식 상업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이 전통의 종로 시전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종로 시전은 먼저 가족·동족끼리 자본금을 모아 가족기업·동족기업 형태의 상점을 설립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종로 시전 김태희 집안이다. 김태희 집안은 조선 후기 이래 서울에서 살아온 무인양반(武班)계였다. 1897년 김성호의 4남 가운데 김상열·상태·상학 삼형제가 공동출자·합자·동업 방식으로 종로 시전의 수진상전(壽進床廛) 동쪽 끝에 수남상회라는 20칸짜리 포목상점을 열었다.
1905년에는 박승직·김종한·박기양·신태휴·김한규·홍충현·최인성 등이 광장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해 새 ‘광장시장’을 세우고자 했다. 1906년에는 박승직이 백목전 상인들과 함께 합명회사 창신사(彰信社)를 설립하였으며, 1907년에는 30~40명의 포목상과 함께 합명회사 공익사(公益社)를 설립했다. 1910년대 중반부터 종로 거리 곳곳에 신식 건물이 조선인들에 의해 지어졌고, 간판도 내걸리기 시작했다.
화신, 조선 최대의 상업회사로 성장
또한 조선인 상업회사의 개별적인 규모를 보면, 공칭자본금이 20만 엔 이상이었던 상업회사 중 조선인 상업회사는 17곳으로 종로 2정목의 화신연쇄점의 자본금 규모가 가장 컸다. 그 외 종로에 있던 상업회사는 화신(和信), 대창사(大昌社), 삼환상회(三環商會), 대성무역(大成貿易), 선일지물(鮮一紙物), 조광상사(鮮光商事) 등이 대표적이다. 1938년 당시 상업자본의 규모가 컸던 조선 상인으로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조선관염판매(朝鮮官鹽販賣)의 박호양, 최윤석상점(崔潤錫商店)의 장기천, 유한양행(柳韓洋行)의 유일한, 대창사의 백락원 등이었다. 이 중 백락원은 유일하게 누대에 걸친 종로 시전 상인 집안 출신으로 1916년 전통의 가업인 견직물 상점을 대창무역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종로뿐만 아니라 조선 제일의 상업회사 화신연쇄점은 박흥식이 대표였다. 박흥식은 평남 용강 출신으로 1926년 7월 상경하여 종로 2정목에 선일지물을 창설하였다. 이의 성공으로 박흥식은 일약 종로의 주목 받는 청년실업가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히라다(平田), 쵸지야(丁子屋), 미나카이(三中井), 미츠코시(三越) 같은 일본인 백화점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종로의 상권은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일본 상권에 대응하여 종로에서는 최남의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와 신태화의 화신상회(和信商會)가 백화점 수준에 근접한 조선인 대형 상점으로 부상했다.
이후 경영난에 빠진 화신상회를 1931년 9월 15일 박흥식이 인수하여, 1932년 5월 10일 콘크리트 3층 건물(약 500평, 남녀종업원 153명)의 화신백화점으로 출범시켰다. 박흥식은 자신이 만든 학교를 전투기 생산 인력 양성소로 바꾸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해 광복 후 반민특위의 1호 체포 인물이 되기도 했다.
박흥식은 1934년 6월 15일 전국 각지에 연쇄점을 설치할 계획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350개의 화신연쇄점이 개설되었다. 연쇄점이란 여러 곳에 점포를 설립하되 본부가 상품을 일괄 구매하여 가맹점의 필요에 따라 공급하는 소매방식의 체인이다. 종로에서 최초로 근대 프랜차이즈가 시작되어 조선 최대의 상업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근대 조선의 경제는 종로에서 싹을 틔운 뒤 자라나기 시작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문혜진 부경대학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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