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체포특권 폐지 서약, 미룰 일 아니다 [동아시론/김윤철]
국회법 개정 통한 특권 약화 의견이 많아
서약은 ‘정치 달라져야 한다’ 요구에 대한 응답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은 유서가 깊은 제도다. 의회민주주의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정치의 시조인 영국이 1603년 의회특권법을 명문화한 이후 민주정치체제를 표방하는 세계 각국이 헌법으로 수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취지는 국가(행정·사법) 권력으로부터 의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폐지 운운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정치권은 폐지하겠다는 공언을 심심치 않게 해왔다. 2012년 19대 국회에서도 여야(당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가 공히 폐지를 선언한 바 있다. 여야 공동까지는 아니어도, 정치개혁안으로 이런저런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폐지를 약속해 왔다.
불체포특권을 문제 삼는 것이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원조인 영국에서조차 폐지 논의가 있었다. 1967년의 일인데, 당시 의회특권특별위원회가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그 후 영국은 폐지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불체포특권을 약화시켰다. 교통 법규 위반까지 포함하는 치안방해죄 등 거의 모든 형사 범죄에 대해 불체포특권을 적용하지 않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사실상 특권의 모든 중요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1995년에는 프랑스가 헌법을 개정하면서 불체포특권의 적용을 제한했다. 불체포특권은 의원으로서의 직무 수행에 엄격히 필요한 정도에 그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소추에 대한 특권 부분을 제외했다. 1990년대 들어 체포동의 요구가 급증했는데, 그중 소추에 대한 동의 요구가 다수였던 점을 감안했다.
영국에서의 폐지 권고는 약화를 위한 압박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고, 프랑스에서의 헌법 개정은 폐지를 거론하지는 않는 가운데, 요구의 내용적 특징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정치권이 폐지를 시도하거나 그에 대한 약속을 한국처럼 빈번하게 혹은 주도적으로 논의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나라와 달리 한국의 정치권이 유독 먼저 나서서 폐지를 공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짐작하건대, 다수가 폐지에 찬성하는 여론일 것이다. 그래서 폐지 서약을 하면 지지를 회복하거나 올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올 2월 말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 57%가 폐지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유지는 27%, 유보는 16%).
한국의 경우 불체포특권 폐지를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폐지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폐지론자마저 포함한 다수의 정치와 법 전문가들이 국회법 등의 개정을 통해 약화 혹은 합리화하는 게 타당하다고 권고해 왔다. 개헌도 정치권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의제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아마도 “개헌을 통해 실제 폐지가 가능하겠냐”고 물으면 긍정적 응답이 다수일지 의문이다.
다수가 폐지에 찬성하는 여론이 조성된 이유는 툭하면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는 정치권을 미워하고 야단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고, 그 헌법적 절차에 기대 대통령을 탄핵시켰던 국민이 개헌을 통한 불체포특권 폐지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또 정치권의 폐지 서약이 실제 개헌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리도 없다. 폐지 서약 여부는 정치가 달라져야 한다는 요청에 성심껏 반응하느냐를 판단할 지표일 따름이다. 그래서 폐지 반대-개정론자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국민의힘이 서둘러 서약을 마친 것은 이를 잘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민주당이 모를까? 안다면 서약을 미룰 이유가 없다. 모른다면 ‘정치할 능력’이 없다. 정세를 못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고도 미루고 있는 것이라면 폐지 서약 이후 자당 소속 의원들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인데, 그래서 서약을 미룬다면 ‘정치할 자격’이 없다. 다수의 요구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요구에 반하면서까지 ‘서약을 안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진심으로 폐지에 반대―혹은 개정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서약을 미룰 이유가 없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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