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말하기’와 ‘읽고 쓰기’…그 틈새에서 열린 사고의 새 지평[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고유한 지적능력으로서의 아이겐밸류를 찾기 위해 ‘발견하다’와 ‘수집하다’에 이어 우리가 검토하고 재서술하려는 세 번째 동사는 ‘읽고 쓰다’라는 행위이다. 사실 우리가 지식을 획득하고 공유하는 일에 있어서 읽고 쓰는 일만큼 친숙한 행위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시기와 가장 오래된 문자기록의 등장 시기를 빗대어 보면, ‘읽고 쓰다’라는 행위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니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인류가 앎을 획득하고 공유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통로는 ‘읽고 쓰는’ 행위 이전에 오랫동안 ‘듣고 말하는’ 것이었다.
‘읽고 쓰다’가 문자를 대상으로 하는 행위라면 그에 대한 대립항인 ‘듣고 말하다’는 음성을 대상으로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듣고 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우지만 읽고 쓰는 일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문자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통해 지식의 배움과 소통이 가능해진 이후에도, 들음을 통해 배우고 그 배운 지식을 다시 말함을 통해 전수하는 이 전통적인 방식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문자를 통해 읽고 쓰는 일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적어도 플라톤 <파이드로스>의 유명한 이야기는 그런 시각을 보여준다.
플라톤 ‘파이드로스’엔 “글자는 기억·지혜의 약”이라는 주장에 반박이 있지만
“그런데 글자의 경우에 이르러, 테우트가 말하길, ‘왕이시여, 이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 지혜롭고 더 잘 기억하게 해줄 것입니다. 기억의 약이자 지혜의 약이 발견되었다는 말씀입니다’라고 했네. 한편 타무스가 말했네. ‘기술이 출중한 테우트여, 어떤 사람은 기술에 관한 것들을 산출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게 될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해로운 몫과 이로운 몫을 갖는지를 분간할 수 있소. 그리고 지금 그대는 글자의 아버지로서, 글자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글자가 발휘하는 능력과는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소.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것은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하게 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제공할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에 대한 신뢰로 인해 외부로부터 남의 것인 표시에 의해 기억을 떠올리지, 내부로부터 자신들에 의해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 환기의 약을 그대가 발견한 것이오. 다른 한편, 그대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지혜로워 보이는 의견을 제공하지 진상을 제공하지는 않소. 왜냐하면 그대 덕에 많이 듣게 되어 그들은 가르침이 없어도 많이 아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은 무지하며 함께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니, 지혜로워지는 대신 지혜로워 보이게 된 탓이오.’ ”(플라톤, <파이드로스>, 김주일 옮김)
문자가 사람들을 더 현명하게 만들고 기억의 확장을 돕는 도구라는 테우트의 주장에 대해서 ‘그것이 실상은 오히려 기억을 퇴보시키는 것이며 지혜롭게 되기보다는 더 무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이집트 왕 타무스의 답변은 새로운 문자기술에 대한 고전적 비평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자에 대한 이러한 비평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플라톤의 대화편조차 결국 글자로 인해 살아남았다는 모순적인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필경 우리가 듣고 말하는 것 대신 읽고 쓰는 수고로운 행위를 통해 지식을 획득하고 공유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읽고 쓰다’라는 행위에 대한 우리의 검토는 듣고 말하는 일에서부터 읽고 쓰는 일로 넘어올 때, 지식의 획득과 공유와 관련하여 얻은 것과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계산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많은 연구들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차이와 그 관계를 밝히기 위해 진행되어왔다. 그중에서 대표적으로 월터 옹의 기념비적 작품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에서 정리한 구술문화의 9가지 특징을 되짚어보면서, 언어를 구술하는 것에서부터 문자를 쓰거나 인쇄하는 것으로의 변천이 가져온 손익계산을 셈해보자.
옹은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와 표현이 필사문화나 활자문화에서 도출되는 사고와 표현에 비교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보인다고 소개하였다. (1) 종속적이기보다 첨가적이다. (2) 분석적이기보다 집합적이다. (3) 장황하거나 다변적이다. (4)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다. (5) 인간 생활세계에 밀착된다. (6) 논쟁적 어조가 강하다. (7) 객관적 거리를 두기보다 공감적이며 참여적이다. (8) 항상성이 있다. (9) 추상적이기보다 상황 의존적이다.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이 9가지 특징을 축약하고 종합해서 설명해보자면, 구술문화에서 사고와 표현은 문자문화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문법 구조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분석적이고 추론적인 종속관계를 표현하기보다는 병렬적으로 첨가하며 나열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항상 정형화된 형용구와 명사가 결합된 방식처럼 집합적인 더미의 형태로 단어들이 조립되어 나타나며, 그러하기에 논리정연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장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여러 세대에 걸쳐서 되풀이하여 입으로 말하며 지식을 보존하고 전수하기에 구술문화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취하게 된다. 지식을 구조화하여 추상화하는 기록경험과는 달리 일상생활에 더 밀접한 관련 속에서 개념을 끌어내고, 그래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언제나 현재의 상황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청자들로 하여금 듣는 과정 중에 알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공감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구술세계에 참여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짧게 설명한 이 특징들이 구술문화에서의 사고와 표현의 성격들을 포괄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특징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더 치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특징들은 문자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낯설게 느낄 만한 ‘듣고 말함’의 성격들을 이해하고, 친숙하게 생각하는 ‘읽고 씀’이 불러온 변화를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위의 특징들이 갖는 장점과 단점을 교차하여 반대로 되돌려놓으면 그것들이 곧 어느 정도는 문자문화에서의 사고와 표현들의 특징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9가지 특징들을 역전시켜 문자문화가 갖는 가장 큰 약점을 짚어본다면, 쓰인 말들이 실제 발화하는 과정을 통해 전달했을 때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수많은 메시지들이 화자의 몸짓, 말하는 톤, 대화자들이 놓인 물리적 환경이 이루는 맥락 속에 녹아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부터 기록은 말을 분리시켜 텍스트가 기록되는 공간 속에 고립시킨다. 옹은 ‘구술문화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이 문자문화에서 죽어 있고 정지된 글로 환원되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설명한다. 그래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기록된 말이 잃어버린 맥락을 최대한 복원하면서 텍스트 공간 속에 박제되어 있는 말에 다시 호흡을 부여하여 되살리는 독자들의 작업으로 해석된다.
문자로 기록된 말은 지식 생성·획득·공유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아
이런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구술문화가 갖는 장점들을 고수하려는 완고한 노력들이 상당히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이를테면 여전히 대화의 형태로 글을 씀으로써 글을 읽으면서도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거나, 문제제기와 논박의 형태로 제시하여 글을 읽으면서도 실제 논쟁 과정에 참여하는 것 같은 효과를 거두려 했다거나, 사실상 낭송을 하기 위한 용도로 글을 기록했다거나 여러 예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기록된 말은 결국 지식의 생성, 획득, 공유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변천은 그 과정의 단계마다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무엇보다 고찰하는 과정 중에 우리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강하게 투영할 수밖에 없어서 쉽게 정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연재의 목적과 관련하여 이 변천이 갖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기록된 말은 하나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학자들은 쓰기가 도입된 초기에 대개 제한적인 문자문화의 발전 과정으로서 ‘장인문자성(craft literacy)’이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석공과 목수가 각각 건축물을 짓고 배를 만들 듯이 기록물을 만드는 일을 소수의 기록 장인들이 맡았다는 점을 말하는 용어이다. 목소리로 전해지는 말은 사라지고 남지 않지만, 글자로 쓰인 말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기록된 작품들은 도서관의 수집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둘째, 시각으로 파악 가능한 공간(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 등)에 기록된 글들은 이제 되감거나 앞으로 빠르게 넘기면서 텍스트의 이곳저곳을 탐색할 수 있는 자유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잭 구디는 <야생정신 길들이기>에서 이 과정을 ‘뒤돌아보는 통람(Backward Scanning)’이라고 이름 붙였다. 목소리로 전달되는 말은 공기 중에 흩어져버린 뒤에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된 말은 특정 장소에 멈추어있기 때문에, 전체 지식을 이루는 각 문장들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 문법적인 구조 등을 중심으로 더 예리하게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철학, 신학, 과학적 탐구는 기록된 글들에 대한 정형화된 분석으로 점차 발전했다.
셋째, 기록된 말들이 축적되고 이 축적된 기록들에 대한 분석이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탐구하는 대상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예리한 언어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고도화의 증거는 바로 언어사전의 등장이다. 생활의 경험에 농밀하게 뿌리내린 구술의 언어에서는 특별히 사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전이 필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어에 다양한 층위의 의미가 축적되어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의미 스펙트럼 총체를 보여주어야 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해당 단어에 대해 사뭇 다른 이해의 지평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옹은 <웹스터 국제사전>을 예로 드는데, 제3판 웹스터 사전에는 총 45만 단어가 수록되어 있었고, 사실은 가능하다면 그 몇 배에 이르는 단어도 수록해야 할 정도로 기록된 말들의 어휘가 늘어났다는 점을 소개했다. 이러한 문자문화에서 어휘의 폭발적 증가는 구술문화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변화의 핵심은 결국 문자문화에서 말을 기록하여 보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자. ‘읽고 쓰는 것’이 기록의 보존이라는 특성 때문에 여러 단점을 극복할 만한 장점들을 만들 수 있었다면, 만약 음성을 기록하는 일이 문자를 기록하는 일과 동시대에 경쟁적으로 가능했었다면 어떠했겠는가? 소리의 기록을 친숙하게 접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상상이 낯설지 않다. 그럴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일찍 소리들도 하나의 작품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을 것이고, 앞뒤로 탐색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음성으로 기록된 말들에 대한 사전들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텍스트의 굴레’에도 글은 말의 단점을 뛰어넘어 입체적인 사고의 문을 열어줘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본 뒤에도 여전히, ‘읽고 쓰다’와 ‘듣고 말하다’의 결정적인 차이가 남는데, 이 차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보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사고방식(mentalite par les yeux)과 듣는 행위가 촉발하는 사고방식(mentalite par l’oreille)의 차이로 귀결된다. 이 관점에서는 소리가 설령 일찍부터 똑같이 글자처럼 기록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읽고 쓰는’ 행위가 고유하게 성취하는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글이 쓰여 있는 공간 안에서 글로 표현된 사고를 더욱 복합적으로 조합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화된 음성은 기본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소리는 하나의 연장된 선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고, 기록된 소리에 있어서도 앞뒤로 진행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복잡한 재구성은 쉽지 않다. 그에 비해 쓰인 글은 평면적이고 때로 입체적 구성도 가능하다. 글에서 다루는 항목들에 대한 체계를 구성할 수 있고, 목록을 도식화하여 작성할 수 있으며, 멀리 떨어진 정보들을 입체적으로 엮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차이에 주목하여 쓰인 글로서의 텍스트가 어떻게 공간 안에 고정되어 여러 흥미로운 지식들의 상호관계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 코덱스(현대의 책과 비슷한 형태로 종이 낱장을 묶어서 표지로 싼 것)의 형태로 글을 쓰게 된 것이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본문의 공간과 여백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또 글을 쓰는 방향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비롯한 글의 시각적 구성에 대해 다룰 것이다.
당분간 몇 회 동안은 읽고 쓰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겠지만, 필사문화와 인쇄문화가 가져온 변화들을 검토하는 이 연재글의 여백에서 독자들께서는 계속해서 듣고 말하는 행위의 가치를 함께 생각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디지털 시대의 읽고 씀을 다룰 때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제 다시 듣고 말하는 것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갖는 즉각적인 상호성이 그 이유다. 대부분의 글들은 읽히기만 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이 글도 다른 많은 글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메아리를 얻지 못하고 외롭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대화는 그 특성상 듣기만 하고 말하지 않기는 어렵다. 듣고 말하는 행위의 독특한 매력은 계속해서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고, 이 상호성이 디지털 시대의 읽고 씀의 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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