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깨는 반전 가득찬 이야기 뒤에 남긴 ‘희망’[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기자 2023. 7. 14. 21:4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여운 것들
엘러스데어 그레이 지음·이운경 옮김
황금가지 | 476쪽 | 1만8000원

서점에서 <가여운 것들>을 발견하고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트모던적 재해석’이라는 출판사의 마케팅 문구를 봤을 때 나는 이 책이 젊은 여성 작가가 야심을 가지고 쓴 SF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인공지능(AI) 버전 프랑켄슈타인이 나올 거라고 순간 확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책을 사서 집에 와보니 내 짐작은 틀렸다. <가여운 것들>의 저자는 1934년생 남성 작가였다. AI나 로봇 같은 건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편협한 예상이 빗나갔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색안경을 끼고 팔짱까지 낀 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1800년대 초반에 여성 작가가 발표했던 명작을 1934년생 남성 작가가 다시 썼다, 이거지? 어디, 어떻게 재해석을 해놨나 보자!’

솔직히 말해서 아니꼬운 눈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갔지만, 이내 생각보다 재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 챕터를 끝낼 때 강렬한 호기심을 일으키면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게 하는 솜씨가 웬만한 넷플릭스 드라마 뺨쳤다. 초반부를 읽으면서 받은 인상은 이 책에 불편하고 비윤리적인 면이 있지만 작가도 그 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여운 것들>에서 일종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사람은 ‘백스터’라는 젊은 의학도다. 소설은 백스터의 대학 동기이자 친구인 ‘맥캔들리스’(이하 ‘캔들’)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화자 캔들은 백스터가 저지른 짓이 끔찍하고 역겹다고 느낀다. 실제로 백스터는 그런 짓을 했지만, 여기서 자세하게 쓰고 싶지는 않다.

백스터는 역겨운 짓을 해서 자신의 손으로 다시 살아나게 만든 인간에게 ‘벨라’라는 이름을 붙인다. 캔들은 나중에 벨라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벨라는 그가 살면서 본 중에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이다. 캔들은 백스터의 고백으로 벨라가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 알게 되지만, 그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캔들은 벨라에게 청혼하고, 두 사람은 약혼한다.

‘이제 벨라와 캔들이 결혼해서 부부로 살며 어쩌구 하는 건가?’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책을 읽는데, 어라? 전개가 예상을 또 뛰어넘는다. 벨라는 캔들과의 결혼을 앞두고 장점이라고는 ‘잘생김’밖에 없는 카사노바 변호사와 야반도주를 해버린다. 캔들을 마취시켜 잠들게 만들고 말이다. 백스터는 벨라가 날건달 놈팡이 같은 던컨 웨더번의 꼬임에 넘어가 위험에 빠지게 됐다고 한탄하지만, 캔들은 생각이 다르다. “나는 나를 클로로포름으로 기절시킨 여성이 과연 누군가의 무력한 노리개가 될 것인지 의심스럽네. 어쩌면 우리는 웨더번을 측은히 여겨야 할지도 몰라.”

캔들의 생각대로 웨더번은 결국 가여운 처지가 된다. 벨라는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내키는 대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욕망이 이끄는 대로 한다.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벨라의 매력에 푹 빠진다. 벨라는 해맑기만 하지도 않고, 팜파탈도 아니다. 벨라는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가졌고, 편견이 없으며, 솔직하고, 연민과 사랑이 넘친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잔인함과 비참함, 불공평함을 목격하고 나서는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삶의 방향을 정한다.

‘그래도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한계가 있네. 벨라가 너무 이상화되어 있잖아. 그리고 진짜 벨라 같은 여자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 여자는 백스터와 캔들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벨라는 모험을 마치고 돌아와 캔들과 결혼한다) 자유를 찾아 영영 떠나버렸을걸?’

하지만 이번에도 내 생각이 틀렸다. 작가는 나 같은 독자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캔들의 이야기 뒤에 반전이 담긴 부록을 덧붙여놨다. 그건 ‘진짜 벨라’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캔들 시점으로 쓰인 앞의 이야기를 명쾌하고 날카롭게 몽땅 뒤집어버린다.

그때까지 내 코에 걸쳐져 있던 색안경은 어느새 스르륵 미끄러지고, 나는 앞 장으로 되돌아간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되어서 대충 넘어갔던 부분을 다시 읽는다. ‘편집자인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이제야 나는 내가 작가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유쾌하고 시원하다! 악의 없는 장난에 당한 기분이다.

모든 트릭을 알게 된 다음 충분히 웃고 나면 책이 던진 질문 하나가 남는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벨라 눈에 비친 세계는 인간이 착취 구조 아래서 잔인해지거나 비참해지는 곳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배경은 제국주의가 세계 곳곳을 장악했던 시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를 가리킨다. 세계는 더 좋아질 수 있는가? 작가는 그렇다고 믿는 듯하다. 인간이 변한다면 세계는 나아질 수 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 책의 마지막 한 조각은 희망이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고, 아직은 나아질 수 있다.

이종산 작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