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의 편리함보다 도전과 떨림…‘잃어버린 찐여행’을 찾아서
동반 해외여행을 갈 때 자녀가 부모에게 다짐받는 ‘금기어’가 화제다. “아직 멀었니? 음식이 달다(짜다), 겨우 이거 보러 왔니? 조식이 이게 다니?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겠다. 돈 아깝다” 등의 여행지에서 나올 법한 불평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취지다. 시니어에게 주체적인 여행이란 없을까. 그저 자식 손에 이끌려 다니거나, 단체 패키지에 의지해야 할까. 나이와 상관없이 멈출 수 없는 방랑기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시니어 3인에게 진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는 둘도 없는 여행 메이트’ 염동근·조상열 부부
역할 분담·에티켓 지켜…“MZ세대처럼 다니세요”
마음 맞는 여행메이트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염동근(61)·조상열(59)씨 부부(사진)는 천생 여행메이트다.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둘만의 여행이 시작됐다. 부부는 1년에 스무 번 정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떠나고 싶을 때 훌쩍 짐을 싼다.
“올해도 벌써 여덟 번째 여행을 다녀왔어요. 여행은 떠나면 떠날수록 습관이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여행메이트의 첫 번째 조건은 가족이라도 여행 에티켓을 지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걸 기본으로 한다”고 말한다.
“남편은 아침형 인간이고 저는 저녁형 인간이에요. 저는 여행지에서도 늦잠을 자고 남편은 아침 일찍 산책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요.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죠. 여행은 삶과 닮아서 여행을 하며 서로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역할 분담을 확실하게 하는 것도 원활한 여행에 필요하다. 아내는 목적지부터 식당, 숙소 등 여행 전반을 준비하고, 남편은 운전과 사진 촬영을 담당한다. 아내 조씨는 “운전 중 남편을 위한 과일 제공, 졸음 방지 마사지도 내 담당”이라고 덧붙인다.
중년이 되고 나서 여행은 관광에 그치지 않고 둘만의 시간이 됐다. 부부는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나 뒷모습 사진을 주로 남긴다. 사진은 기록이면서 그 자체로 추억이 된다. 조씨는 시니어 여행에서 꼭 필요한 것은 선글라스와 모자라고 말한다. 기능성뿐만 아니라 사진 촬영용 소품으로도 제격이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등산복은 금물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삼각대를 가지고 다녀요. 젊었을 때 못해본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보려 해요. 뻔한 사진 말고 MZ세대가 하는 기발한 포즈를 따라하기도 해요. 사진 이벤트에 응모하는 것도 여행이 남긴 묘미예요. 작년에는 여행사 이벤트에 응모해 숙박권도 받았어요.”
조씨가 시니어 부부를 위한 여행지를 추천했다. 풍경이 좋아 부부가 손잡고 걷기 좋은 국내 여행지다. 대전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은 잔잔한 대청호를 걷다 보면 서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주변에 상소동 삼림욕장도 들르면 좋다.
경주 ‘천년의 숲’도 추천한다. 숲을 거닐다 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고목이 울창한 경주 계림숲도 새소리를 들으며 걷기 좋은 코스다. 겨울에 가서 좋았으니 다른 계절은 말할 나위 없다. 합천 정양 레포츠 공원의 물안개와 풍경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고생 끝에 오는 행복’ 도보여행 예찬론자 김지백씨
“낯설어야 새로워…산티아고 순례길 밟아 보세요”
트레킹 전문 시니어 여행가 김지백씨(77·사진)는 산티아고 주요 4대 길(프랑스 길, 은의 길, 북쪽 길, 포르투갈 길)을 비롯한 6개 루트를 완주했다. 시니어 여행 그룹을 산티아고로 인솔해 간 것만 아홉 번으로 총 7000㎞ 이상 도보 여행을 한 베테랑이다.
“도보 여행의 매력은 과정에 있어요.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휭하니 갔다 오면 빨리 다녀올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별로 기억에 없어요. 도보로 가다 보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느끼고 에피소드가 많아지죠.”
물론 고행길이다. 고비는 걷기 시작하고 3~4시간 지난 후 즈음 찾아온다. 허리, 팔다리, 발바닥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배낭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의 어깨끈을 이리저리 옮겨 매다 보면 어느새 아픔을 잊는다.
“하루에 25~40㎞를 걸어요. 숙소에 도착해 저녁 먹고 씻고 녹초가 되어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 행복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죠. ‘내일 아침 일어날 수 있을까?’ 걱정도 드는데, 인체는 참 신비로워요. 하룻밤 쉬고 나면 또 새로운 기분이 되어 가뿐하게 출발할 수 있거든요.”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하면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하는 807㎞의 프랑스 길을 일컫는다. 하루 25㎞ 이상 강행군해도 30일 이상은 잡아야 한다. 김씨가 초행에게 추천하는 코스는 16박17일 단기로 떠나는 프랑스 길이다. 그중 풍경이 가장 예쁘다는 220㎞ 코스를 권한다. 단기라도 시니어가 도전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그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처음 3일이 가장 인솔하기 힘들어요. 걷는 것도 힘든데 잠자리도, 먹는 것도 열악하니 불평불만이 쇄도하죠. 일주일이 지나면 점점 자신감이 생겨요. 흔히 말하는 ‘깔딱 고개’를 넘은 거죠. 다들 알아서 맛있게 식사하고 잠자리 준비도 척척하게 되죠.”
김씨는 산티아고에서 도보 여행을 마치면 가까운 유럽의 도시로 날아가 한 바퀴 배낭여행할 것을 추천했다. 그의 루틴이다. 유럽에 한 번 가는 비용으로 두 배의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길을 끝내고 베를린에 갔고, 은의 길을 끝내고 크로아티아를 한 바퀴 돌았어요. 유럽은 기차 타고 이동하기 좋고 배낭여행자를 위한 호스텔에 가서 자면 여행객들에게 정보도 얻을 수 있어요. 이렇게 다니면 비용도 크게 안 들어요.”
그는 여행정보센터를 적극 활용하라고 말한다. 센터 직원에게 그 지역의 명소를 물어본 뒤 동선을 짠다. 구글 지도가 없던 시절에는 동서남북 방향을 가늠해 다녔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 숙소는 이동이 편한 도심 위주로 숙박 앱을 이용해 실시간 예약한다. 곽튜브, 빠니보틀 같은 젊은 여행 유튜버 못지않은 즉흥 여행이다.
“배낭여행은 사람 구경이에요. 스페인이라도 지역마다 색이 다르거든요. 나이 들어도 견문을 넓혀야 해요. 인생 말년 집에서 보양식만 찾아 먹는 삶이 좋을까요? 낯선 곳 찾아다니며 늘 새로움을 만끽하는 삶이 좋을까요?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건 배낭여행을 시작한 겁니다.”
‘170번 이상 떠난 기차여행’ 자유로움 좇는 박승우씨
“일본 철도, 홀로 여행에 적합…긴장감 있어야 재미”
<JR기차 타고 즐기는 일본 온천 50>의 저자 박승우씨(67·사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여지없이 여행 중이다. 현재 친구들을 데리고 여름 홋카이도를 만끽 중이다. 그가 본격적인 방랑자의 길에 들어선 지 30년이 됐다. 일본 철도 여행을 즐긴다. 170번 넘게 했어도 기차여행은 여전히 힐링이다.
“기차는 버스처럼 답답하지 않고 또 자유롭잖아요. 특히 일본 기차는 해안선을 끼고 발달해 있어 창밖 경치가 무척 좋아요. 도심에서 30분만 달려 나가면 대자연이 펼쳐지죠. 발길 닿는 소도시 역에 내려 구경하고 또 타고 떠나면 되니 내 속도에 맞춘 여행을 할 수 있어요.”
그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가는 도쿄나 오사카 같은 도심 여행은 잘 모른다. 주로 가는 곳은 시골 소도시나 경치 좋은 곳, 옛 정취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별 계획 없이 기차에 몸을 싣고 하루에 한 도시 정도 여유로운 여행을 즐긴다. 교통비 비싼 일본이지만 외국인을 위한 철도여행용 레일패스를 적극 활용하면 편리하게 다닐 수 있다. 일본 열도를 크게 동부와 서부 두 지역으로 나누면 총 12가지 JR 레일패스가 있다.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3일권, 5일권 등이 있어 원하는 일정으로 구입하면 된다. ‘최소한의 짐’은 여행 베테랑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여행 팁이다. 몸이 가벼워야 이동이 쉽다.
“그룹여행을 인솔할 때면 첫날과 마지막 날 같은 숙소를 잡습니다. 큰 짐은 숙소에 맡겨두고 가벼운 배낭만 메고 지역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 근처 소도시 온천여행을 다녀옵니다. 그런 식으로 80세가 넘은 시니어 여행객도 함께한 적이 있어요. 힘들어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가 일본 철도 여행에 대해 쓴 책의 부제는 ‘일본 온천 여행, 패키지로 가지 마라’다. 그는 편하게 다녀오겠다면 패키지를 이용하면 되지만, ‘그것이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까’라고 반문한다.
“가이드가 데려다주고 사진 한 장 찍는 여행이 기억에 남을 리 없어요.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모를 수 있어요. 스스로 여행 계획을 짜고 긴장한 상태로 다녀야 생생하게 기억하죠. 또 일본은 국도 사정이 별로 좋지 않고 관광버스는 시속 60㎞ 이상 못 달려요. 특급 열차를 타고 가면 2시간이면 갈 곳을 관광버스로는 4시간이 걸리죠. 버스로 다니는 패키지여행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는 일본이 시니어가 자녀나 여행사의 도움 없이 홀로 첫 해외여행을 도전하기 최적화된 곳이라고 말한다. 어디든 한글 안내판이 있고 재일교포가 많아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으며 음식이 우리 입맛에 맞다는 이유다.
“제가 일정표를 짜고 호텔 예약까지 해서 친구를 여행 보낸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수시로 카톡과 전화가 왔는데 벌써 일곱 번째 홀로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이젠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 하나 오고 끝입니다. 다니다 보면서 익숙해지니까요.”
그는 시니어에게 보호자 없는 여행이 두렵겠지만 ‘일단 한번 저질러보라’라고 권한다. 그렇게 한번 다녀오면 여행에 대한 자신감은 물론 성취감이 따라온다.
배낭여행, 알아두면 이득
1. 배낭은 10㎏을 넘으면 안 된다
시니어의 해외여행에서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밥과 김치, 고추장이다. 도보여행에서는 이를 과감히 빼야 한다. 짐 무게 때문이다. 여행 내내 지고 다녀야 하는 배낭 무게는 10㎏을 넘어선 안 된다. 매일같이 샌드위치나 과일, 물을 사서 다녀야 하므로 1~2㎏ 여유분을 고려해야 한다(최근 프랑스 길에는 짐만 숙소로 먼저 보내는 서비스가 있지만 여러모로 귀찮고 비용이 든다).
2. 신발이 중요하다
발에 물집이 생겨 걸을 수 없으면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긴다. 트레킹화도 신어봤는데 비가 오면 물이 들어가고 바닥이 얇아 울퉁불퉁한 산티아고 길과는 맞지 않는다. 다소 무겁지만 부상을 막아주는 등산화를 추천한다. 배낭 역시 튼튼한 등산용이 좋다.
3. 옷은 기안84처럼
도보 여행에서는 걸을 때 입는 여분의 옷 한 벌, 쉬면서 입는 옷 한 벌이면 충분하다. 숙소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 4유로 정도만 내면 세탁할 수 있다. 옷은 예능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 나오는 기안84처럼 단출하게.
4. 스마트폰을 잘 활용하라
한번은 스페인어 공부를 한다고 책을 챙겼다가 버리고 온 적이 있다. 생각보다 숙소에서 여유롭게 독서할 시간은 없다. 사진가가 아니라면 카메라도 짐이다. 요즘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다.
5. 매일 먹는 약 외에는 현지에서
현지에는 약국이 많다. 번역기로 의사소통하며 현지에서 필요한 약을 살 수 있다. 매일 먹어야 하는 고혈압이나 당뇨병약 정도만 준비한다.
6. 이것은 꼭 챙겨 가자
순례자 숙소에서 일회용 시트와 베갯잇은 주지만 덮는 이불은 없으니 침낭을 꼭 챙겨야 한다. 또 아침에는 해를 등지고 가지만 저녁에는 해를 마주 보고 간다. 챙 넓은 등산 모자와 선글라스는 필수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우의도 챙긴다. 겨울이라면 방풍·방수 재킷이 필수.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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