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여름의 빨강을 보관하는 법
레몬즙과 담근 빨강 피클
냉장고 기분 좋은 냉기 속
이 시절의 빨강을 담는다
계절을 하나의 색으로 표현한다면 여름은 무슨 색일까? 나에게 봄은 꽃과 새소리의 노란색, 가을은 쌉싸래한 커피에 우유를 조금 탄 연갈색, 겨울은 차고 단단한 광물질의 은회색이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지금, 나는 선명한 빨강이 떠오른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 해변의 모래사장을 맨발로 뛰어가는 아이의 그을린 살갗, 치이― 케에― 쓰아― 하고 우는 매미 소리는 투명하면서도 짙은 빨강과 어울리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여름의 빨강을 대표하는 건 단연 수박이다. 그해 첫 수박으로 여름나기를 시작하고, 설익은 수박 맛과 함께 이제 수박의 시기는 끝났구나, 생각하면 계절은 가을로 접어든다.
올해는 나의 빨간 여름에 비트가 더해진다. 수박의 물기 가득한 단맛을 좋아하는 만큼 레몬의 신맛을 좋아하는 나는 비트와 무, 파프리카를 레몬즙과 함께 넣어 피클을 담근다. 피클 만들기에 앞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 집 냉장고에 피클 통을 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모서리가 둥글고 전체가 환한 라임색인 우리 집 냉장고는 서너 개의 문이 달린 덩치 큰 냉장고와 달리 문은 달랑 하나에, 냉장실도 칸과 층이 단출하다. 좁다란 냉동고는 육수용 멸치나 다진 마늘을 넣으면 꽉 찬다. 애인과 나, 성인 두 사람의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좀 더 넉넉한 냉장고가 편하겠지만, 우리는 이 작은 냉장고에 맞춰 생활하고 있다. 가을부터 겨울까진 식재료를 꼭 냉장 보관하지 않아도 되고, 그 시기에 우리가 즐겨 먹는 고구마도 서늘한 곳에 둘 수 있어서 냉장고 수납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리한 음식도 금세 상해버리는 여름이 오면 냉각 장치의 찬바람이 절실하다. 이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수박을 맞이하는 요즘 같은 날에는 우리의 작은 냉장고가 더 비좁아진다.
"테트리스 하는 것 같네."
피클을 만들기 전 우리는 반찬과 양념통들을 모조리 밖으로 꺼내 그야말로 빈틈없이 쌓고 끼워 넣는다. 냉장고에 빈 곳을 마련한 다음, 재료들을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씻고서 본격적인 '썰기'에 들어간다. 파프리카나 무를 네모나게 써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속이 촘촘하게 들어찬 비트는 무보다 몇 배는 단단하고, 겉면도 둥글고 미끄러워서 칼질하며 자칫 방심했다간 손을 베일지 모른다. 오래 산 느티나무의 나이테처럼 가지런한 물결무늬가 있는 비트는 닿는 곳마다 순식간에 빨간 물을 들인다. 도마, 쟁반, 그릇이 온통 비트에서 나온 물로 빨개질 때쯤 나는 비트 썰기를 끝내고 레몬을 잘라 즙을 낸다. 손목이 저릿하고 손아귀의 힘도 빠져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지만 새콤한 피클의 향과 맛을 상상하며 한 방울의 레몬즙까지 알뜰하게 짜낸다. 손질한 재료들을 소금에 절여 놓고서 얼마 후 달콤한 꿀을 넣어 잘 섞어주면 아삭하고 상큼한 채소절임 완성! "냉장고에 넣을 수 있겠지?"
우리는 비트의 빨간 물이 든 손을 씻으며 냉장고를 바라본다. 손톱 사이사이에 새빨간 물이 스며들어 여러 번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릴 적 이맘때면 봉숭아 꽃잎을 손톱에 얹고 비닐과 끈으로 꽁꽁 싸매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성스럽게 담근 피클도 빨강이 점령해간다. 무와 파프리카의 색은 온데간데없고 노란 레몬 껍질마저 비트 색에 물들어 붉디붉게 변한다. 채소들이 숙성되는 동안 밖에선 장맛비가 퍼붓고, 비가 그친 사이에는 수년간 땅속에서 나무의 수액을 먹고 살던 매미가 높은 곳에 올라 크게 소리친다. 여름에 담근 채소절임에는 그 계절의 소리와 빛깔이 담겨 있지 않을까. 우리의 피를 돌게 해주는 빨강, 태양과 우리의 사이가 가장 가까운 지금 이 시절이 그곳에 담겨 있다. 붉게 물이 든 손으로 라임색 문을 열면 그 여름의 빨강이 기분 좋은 냉기 속에 모여 있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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