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아른대는 ‘오륀쥐’의 그림자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앞둔 2008년 1월.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숙명여대 총장)의 발언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그는 “영어가 곧 국가경쟁력”이라며 초·중·고 공교육에서 일반과목 영어수업, 수준별 영어교육과 같은 이른바 ‘영어몰입교육’을 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인수위원장의 ‘영어사랑’ 발언이 계속되고 관련 공청회까지 열리자 교육계는 발칵 뒤집혔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영어 조기·사교육 심화”라고 비판하는 등 여론이 악화되자 인수위는 결국 몰입교육론을 철회했다. 당시 공교육 부문을 담당하던 인수위 사회분과의 간사가 바로 이주호 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다.
이후 15년여가 지난 최근 영어 조기교육 논란이 재등장했다. 이번엔 유치원이다. 정부는 6월 26일 ‘사교육 경감 대책’을 통해 “영어·예체능 등 학부모 수요가 높은 유치원 방과 후 활동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유치원생 자녀를 둔 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지만 교육·시민단체들은 “유치원 때부터 영어 조기(선행)교육 부담을 갖게 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미국에선 ‘오륀쥐’라고 해야 알아들어”
현 교육과정에서는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부터 배운다.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선행학습 금지법)’에서는 초·중·고에서 학교교육과정을 앞서는 교과를 편성하거나 제공하는 것을 금지(방과 후 활동 포함)하고 있다. 공교육 체계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인지와 발달 정도 등을 고려해 10세가 될 때까지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이 지난 5월 16~29일간 전국 초등 1학년 학부모 1만1000명에게 ‘5세 시기 사교육 관련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결과 서울·수도권에서는 학부모 10명 중 7명이 “학교 입학 전 영어 사교육을 했다”고 응답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경우 선행학습 금지법 규제 대상이 아닌 탓에 3~5세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이나 방과 후 특별활동을 통해 영어교육을 한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입학 전 영어 사교육을 이용한 학부모의 42.6%가 “어린이집·유치원 방과 후 특별활동을 이용했다”고 응답했다.
일명 ‘영어 유치원’으로도 불리는 유아 영어학원을 통한 전문 사교육 역시 성행 중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올 3~5월 중 ‘반일제(6~9시간) 이상’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 대해 전수조사 및 단속을 벌인 결과 전국 847곳이 운영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반일제 미만이나 1~2시간 수준의 보습학원까지 포함하면 유아 영어학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일제 이상 학원의 경우 통상 정규교습시간(4~5시간)과 방과후교습과정(2~4시간)으로 운영해 일반 유치원·어린이집에 준하는 교습시간을 제공한다. 급식비 등을 포함한 학원비는 유치원 등에 비해 월등하게 비싼 월평균 175만원이었다. 일부 학원은 5세 이하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레벨테스트’를 거친 뒤 등원을 허용하기도 한다. 현행법상 유아 영어학원이 ‘영어 유치원’으로 간판을 내걸고 교습하는 건 불법이다. 교육부 단속에서 301곳(35.5%, 518건)이 유사명칭 사용 위반, 교습비 초과 징수 등으로 적발되기도 했다.
전문가 대다수는 입학 전 유아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조기교육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사걱세가 2020년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7명을 대상으로 ‘조기인지교육과 아동정신건강의 인과관계’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70.4%가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응답했다. 전문의들은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이유로 ‘정서발달에 부정적’(89.5%)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낮은 학습 효과’(42.1%), ‘영어 학습 거부 부작용’(21.1%) 등으로 나타났다. 전문의들의 85.2%는 또 영어를 포함한 국어·수학 등 유아 단계의 조기인지교육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응답하면서 그 이유로 ‘학업 스트레스’(95.7%)를 대부분 지목했다.
정부 “유아 사교육, 공교육으로 흡수”
종합하면 입학 전 유아를 대상으로 한 영어 선행교육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고, 그 교육효과는 오히려 유아에게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유치원·어린이집에서 방과 후 활동 등을 통해 영어교육을 더욱 확대하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교육부는 “고액의 유아 영어학원을 보내는 이유는 높은 학부모 기대에 비해 부족한 유아 공교육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며 “학부모의 다양한 교육 수요를 (공교육이) 흡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유아 사교육비 조사’를 신설하고, 유아 영어학원 불·편법 운영을 근절하는 등 제도개선에도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교육시민단체들은 정부 대책이 입학 전 영어 조기교육을 부추기는 꼴이라며 반발 중이다. 정지현 사걱세 공동대표는 “안 그래도 영어 조기교육에 대한 관심이 큰 상황에서 학부모들의 사교육 수요는 더 높아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며 “유아교육과 보육 현장이 오히려 조기교육을 위한 극도의 경쟁의 장으로 변질돼 유아들은 놀이와 쉼을 잃어버리는 비참한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학부모 최현주씨는 “유아 사교육 수요를 공교육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초등 공교육을 더욱 내실화해 유아기의 사교육 불안과 수요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옳은 방향”이라며 “이런 틈새를 노리고 사교육 시장이 비집고 들어와 공략하면서 ‘초등 대비, 취학 전 준비’를 공격적으로 마케팅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신성욱 뇌과학 전문 저널리스트는 “이미 많은 선행 연구를 통해 입증됐듯이 지금도 만연해 있는 과도한 사교육이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이는 다시 뇌건강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원인은 그대로 둔 채 비용만 국가에서 부담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뇌건강에 대한 언급은 없어 안타깝고 황당하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과도한 조기 사교육으로 인한 인지·사회정서·뇌발달 영향 등에 대한 연구를 올 하반기부터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초1 연계 ‘이음학기’ 놓고도 의견 분분
정부는 사교육 경감 대책 중 하나로 입학을 앞둔 5세 아이의 유치원 2학기에 초등학교와 연계된 ‘이음학기’를 운영하겠다고도 밝혔다. 입학 후 학교 적응을 돕고 입학 대비 사교육 수요를 줄여보겠다는 목적이다. 누리과정에서 입학 전 ‘놀이 중심의 언어교육’과 초등 연계 교육과정이 강화된다. 올해 하반기 유치원 400곳에서 시범운영을 시작해 내년에는 1000곳으로 확대되는 등 단계적으로 도입을 확대한다. 구체적인 이음학기 운영계획 등은 7월 말 공개된다.
정부가 언급한 ‘놀이 중심 언어교육’은 한글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글은 정부의 ‘한글책임교육’ 방침에 따라 초등학교 입학 후 자음, 모음 등 기초부터 배운다. 입학 후 1학기 동안은 한글 적응을 고려해 ‘알림장 쓰기’나 ‘받아쓰기’ 등과 같은 과정도 없다. 교육과정 상으론 입학 전 한글교육이 필수가 아니다.
이에 반해 교육부의 2020년 12월 설문조사 내용을 보면 미취학 아동의 87%가 입학 전에 이미 한글교육을 받은 것으로 집계된다. 한글교육 지도 방법에 대해선 71.6%가 “보호자가 직접 지도한다”고 응답했다. 학부모 A씨는 “입학하면 교과서나 수업에서 한글로 교육을 받는데 부모 입장에선 한글을 안 가르치고 입학시키기가 쉽지 않다”며 “한글을 집에서 가르쳐야 하는 부담도 덜게 되고, 아이의 학교 적응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이음학기 운영에 찬성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지현 인천교사노조 수석부위원장(유치원 교사)은 “유-초 연계 교육은 현장에서도 이미 실시하고 있고, 유아들에게도 필요한 교육”이라면서도 “이번 대책은 ‘입학 대비 사교육 흡수’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취학 전 한글과 수학 등 조기교육과 사교육 수요가 늘어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백소영 이천시 육아종합지원센터장은 “유-초 연계과정에서 언어교육을 가장한 한글교육이 필수인 것처럼 인식돼 더 많은 아이를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게 되는 등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결국은 유치원에서 초등교육과정을 선행한다는 것인데, 학습효과도 굉장히 낮을 뿐더러 초1 교육과정과의 중복문제도 생길 수 있다”며 “아이 학습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 도시와 지방,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선행에 따른 계층·지역별 격차가 지금보다 확대될 우려도 있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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