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로 명품을 산다? 청년들의 진짜 현실은 '지옥'이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여성 청년 A 씨는 뜻하지 않게 '생계'와 '안전' 사이 갈림길에 섰다. 사장과 단 둘이 일하는 소규모 사업장에서 사장의 성희롱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A 씨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성희롱을 견디며 봉급을 받거나, 아니면 당장의 직장을 포기하는 것뿐이었다.
본인의 잘못도 아닌데, 안전을 위해선 본인이 생계를 포기해야 한다.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A 씨는 실업급여를 떠올렸다. '당장의 기댈 곳'이 생긴다면 용기를 내서 성폭력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선 '자발적 퇴사'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성희롱 피해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끝내 실패하면 새로운 직장을 찾기까지 A 씨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다. A 씨는 고민 끝에 시민단체 고용 상담실을 찾았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이런 현실을 알고도 실업급여 삭감을 운운할 수 있습니까?"
14일 오전, 여성노동자들이 국회 정문 앞에 모여 A 씨와 같은 청년·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며 '실업급여 삭감 및 하한선 해제'를 추진하고 있는 정부·여당을 규탄했다.
양대노총과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노동단체 연대체인 여성노동연대회의는 이날 "정부는 노동의 주체로서 여성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일을 쉬어도 생계에 문제없는 사람, 국가와 기업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 일 안하고 과한 소비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12일 정부와 국민의힘은 당정 공청회를 열어 실업급여 하한액을 낮추거나 폐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회의 참석자들은 "장기간 근무한 남자분들은 어두운 얼굴로 오는데 여자분들, 계약기간 만료, 젊은 청년들은 이 기회에 쉬겠다고 오고, 실업급여 받는 도중 해외여행 가고 샤넬 선글라스 사고 옷 사고 즐기고 있다"는 등 실업급여 수급자 및 청년·여성노동자들을 혐오하는 발언을 남겼다.
이후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 또한 해당 발언들을 인용하며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일하는 것보다는 조금 덜 벌고 그냥 편하게 쉬고 싶어하는 그런 구조다. 실제로 중소기업은 지금 주력 인력이 5~60대라고 한다. 20대들이 일을 많이 하지 않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정부·여당에서 나온 이 같은 발언들은 △고용보험 가입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비하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기성세대보다 청년세대가, 남성보단 여성이 비정규직 등 불안정 노동으로 내몰리는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저임금에 비정규직, 경력단절에 성폭력까지 … "대체 어떤 여성이 '시럽급여' 수혜자?"
특히 이날 모인 여성노동자들은 정부·여당이 대표적인 '노동약자' 계층인 여성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조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복지수급자에 대한 의심과 낙인, 혐오를 조장하면서 복지 제도를 국민들 사이에 제로섬 게임으로 프레이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령 부정수급은커녕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조차 '내가 실업급여를 수급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A 씨의 이야기는 실제 한국여성민우회의 고용평등상담실에 접수된 상담 사례다.
신혜정 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는 "상담실에는 지금도 종종 직장 내 성폭력과 2차 가해 상황으로 인해 퇴사를 고민하면서 실업급여 상담을 접수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찾아온다"라며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이 사회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구석이 있다면, 용기를 내서 피해 상황으로부터 떨어져 안전함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현실은) 이조차도 받기 쉽지 않다"라고 실제 사회적 위기를 맞은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꼬집었다.
여성가족부의 2022년 통계상 여성은 비정규직 비율(남성 31.0%, 여성 47.4%), 저임금 근로자 비율(남성 11.1%, 여성22.1%), 고용률(남성 70.0%, 여성 51.2%) 등에서 성별격차를 보이고 있다. 육아(43.2%), 결혼(27.4%), 임신·출산(22.1%) 순으로 나타나는 여성의 경력단절 사유도 성역할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와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의 지난 6월 공동조사에 따르면 "여성이고, 직급이 낮고, 직장 규모가 작고, 임금수준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하고, 사무직이 아닌 일터의 약자일수록 더 심각한 괴롭힘을 경험"했다. 성차별을 포함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이후 '직장을 떠나고 싶었다'는 응답 또한 여성(62.1%)이 남성(37.2%)보다, 20대(60%)와 30대(53.3%)가 40대 이상보다 훨씬 많았다.
사회적 위기가 더 자주 찾아오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조건 또한 더 열악한 '노동약자' 계층일수록, 실업급여 수급의 필요성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비자발적 퇴사' 내몰리는 여성·청년들, 현재 실업급여 제도도 포괄 못하는데...
A 씨와 같이 직접적인 성폭력 피해에 노출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현재 노동시장엔 고용 및 승진차별, 육아휴직으로 인한 경력단절 등 업무상의 성차별구조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어 여성노동자들은 비자발적 실직 위기에 내몰릴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지난 12일 발간한 2022년 여성노동자 대상 직장 내 괴롭힘 상담사례 분석결과에 따르면 국 11개 지역에 설치된 여성노동전문상담소 '평등의 전화'에 지난 한 해 동안 접수된 3714건의 상담 건 중 직장 내 괴롭힘 사례는 370건(9.9%)에 달했고, 이중 폭언·폭행을 제외한 괴롭힘(68.8%)이 255건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각 사례로는 △여성의 업무역량을 의심하거나 △여성노동자에게만 업무 내용을 보고하길 요구하거나 △여성들에 대한 반복적인 비하발언을 일삼는 등 '성별을 근거로 한' 업무상의 차별 및 괴롭힘 행위가 주를 이뤘다.
김제이 민우회 성평등복지팀 활동가는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자에게 급여를 덜 주며, 아직도 생계 부양은 주로 남자의 일, 돌봄은 주로 여자의 일이라고 여기고 돌봄 노동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사회"라며 "단지 쉬고 싶어서 일을 그만두고 여행도 떠났다가, 원하면 덜 힘든 직장을 골라잡아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사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사회여야 하지 않나" 되물었다.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임신, 출산, 육아를 병행할 수 없는 직장이기 때문에,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부당하게 밀려났을 때, 현저히 차이 나는 성별임금격차를 확인했을 때, 여성들은 일자리에서 나오고 싶다"라며 "이때 발생하는 퇴직 사유를 자발적 퇴직이라고 정의할 수 있나. 그러나 현재 실업급여는 이들의 퇴직 사유를 자발적 퇴직이라고 하고 지급 대상에서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실업급여 수급기준 완화할 때" … 선별복지 기조 경계해야
이어 김 국장은 "청년과 여성이 실업급여를 신청하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웃으며 노동청을 찾는 게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물으며 "고용이 중단된 노동자는 무조건 우울하고 불안해야 '진짜'라는 극단적인 사고로 가는 것이 '개악'이 아니며 무엇이란 말인가"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노인 장기요양시설 확충 예산 삭감(19.3%), 국공립 노인요양시설 예산 삭감(39.9%),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 예산 삭감(19.3%), 공공보건의료 확충 예산 삭감(61.3%), 공공임대주택 예산 삭감(5조 7천억 원) 등의 복지예산 삭감 행보를 보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최근 사회보장 전략회의에서는 "사회보장 서비스를 시장화하고 경쟁 체제를 도입하겠다"라며 선별복지 기조를 다시 내보이기도 했다.
복지 수급자로 하여금 끝없이 '자격'을 증명하게 하겠다는 취지의 현금중심 선별복지 기조는 그 동안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가난의 대물림, 최저생계 비 보장 문제 등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길'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관련기사 ☞ 한국 복지는 이렇게 말한다 "모멸 견뎌봐, 그럼 돈을 줄게")
지금은 "여성과 청년이 안정되고 평등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양질의 일자리에 대한 선택지를 넓히게 해야 하는 때"인데, 오히려 기업과 개인이 낸 고용보험료를 통해 이뤄지는 실업급여 제도에까지 선별복지 기조를 확장하는 것은 '퇴행'이라는 것이 이날 모인 노동자들의 주장이다. 실업급여와 같은 사회적 지원을 통해 노동자들의 위기방어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발적 퇴사' 기준의 완화 등 수급기준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여당, '청년수당' 논쟁 벌써 잊었나 … 수급자 '신뢰' 바탕해야 정책이 산다
실업급여를 '청년들의 시럽급여'라 호도하는 정부여당의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2015년 서울시 청년수당 도입 당시에도 여당이었던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는 월 50만 원 상당의 현금지원을 골자로 한 청년수당이 '구직 의사가 없는 청년들의 부정수급에 악용될 것'이라는 취지로 해당 정책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청년수당은) 마약성 진통제를 놓는 것" "청년의 정신을 파괴하는 아편"이라는 수사가 나왔을 만큼 지금의 실업급여 비판과도 그 궤가 비슷했다.
구직 중이거나 고용중단 상태에 있는 청년들에게 '삶의 여유'를 주자는 취지로 시행된 해당 정책모델은 현재 경기도 등 전국으로 확대된 상태다. 이주형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는 14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청년수당의 의미는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를 멈추고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에 있었다"라며 "(청년수당을 통해) 아르바이트와 같은 불안정 노동을 반복하면서 구직활동을 하던 삶에서 단 몇 시간이라도 본인을 위해 쓸 수 있는 '삶'이 확보된 것"이라고 평했다.
이 대표는 실업급여를 두고 벌어진 최근 정부여당의 각종 발언들에 대해서 "실업급여에 대한 현재 여당의 공세도 △시민에 대한 불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공공의 역할을 중단해야 시민들이 근로하게 될 것이라는 보수적 시각이라는 점에서 청년수당과 마찬가지다"라며 "청년들이 실업급여로 비싼 샤넬 선글라스 살 수도 없겠지만, 노동자의 안전망이자 권리라는 측면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율성을 보장하고 신뢰에 기반해 존중하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청년수당도 '수당을 치킨 사먹는데 쓰면 어떡하냐'는 식의 마타도어를 많이 당했다. 그런데 청년들이 다양한 사회활동의 측면에서 치킨을 사먹으면 무엇이 문젠가" 물으며 "일명 '샤넬 선글라스' 논란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것을 어떻게 쓰는 것은 시민 개인의 권리이나 자율에 관한 문제다. 용처에 대해 정부와 정치가 간섭하는 것은 대단히 문제적인 행위"라고 지적했다.
누군가 실업급여를 자주 수급한다는 것은, 결국 그가 '불안정한 노동을 반복'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과 같다. 2021년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고용보험 백서'상 2016년부터 2020년까지의 사업장 규모별 실업급여 지급현황을 살펴보면, 모든 년도에서 5인 미만(2020년 기준 21.9%) 및 5~29인(2020년 기준 31.8%) 등 중소 사업장의 실업급여 지급률이 중규모 이상 사업장의 지급률보다 현저히 높게 나타났다. 이 대표는 "정책이 정책 대상 시민을 신뢰하지 못할 때 이 같은 구조적 경향성은 가려진다"고 지적한다.
여성노동연대회의는 "(정부여당은) 실업급여 수급자가 많은 현실에 대해 실업 상태의 노동자를 사회가 어떻게 구제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노동자이자 시민인 실업급여 수급자를 국가 예산을 축내는 존재로 대하며 부정스급 골라내기에 혈안이 됐다"라며 "도대체 정부는 실업급여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꼬집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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