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행복을 위해서야”…마음을 옭아맨 교묘한 굴레[이진송의 아니 근데]

기자 2023. 7. 1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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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감금’을 보호로 믿도록 아내 심리 조종…가스라이팅 다룬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GENIE TV 오리지널 시리즈 및 ENA 월화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은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하는 김태희와, 일명 ‘남편 사망 정식’을 먹는 임지연의 열연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KT스튜디오지니 제공

며칠 전 영화를 보고 나와 일행과 부지런히 식당으로 향했다. 서로 다른 원소들의 불가능한 사랑을 다룬 영화를 본 감동에 젖은 채 먹으러 간 것은 바로 ‘남편 사망 정식’. 남편 사망 정식은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추상은(임지연 분)이 남편이 사망한 후 혼자서 짜장면과 탕수육, 군만두, 그리고 콜라까지 한 캔 곁들여 먹는 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유명해진 ‘밈’이다.

상은은 남편 김윤범(최재림 분)이 살아 있을 때는 임신을 해도 다른 임신부와 달리 뭐가 먹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며 구박을 듣는다. 비쩍 마르고 멍한 얼굴에는 어떤 욕구도 비치지 않는다. 딸기 아이스크림을 기계적으로 입에 욱여넣는 장면은 자해처럼 보인다. 그런데 경찰로부터 김윤범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은 상은은 짜장면을 흡입하면서 손으로 탕수육을 푹푹 집어 먹는다. 경찰서 앞에서 장사하다 보니 사람들의 사정은 척 보면 빤하다는 중국집 주인은, “꼴도 보기 싫은 놈이 사라졌나 봐?”라고 말을 건넨다. 상은의 폭식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폭력의 터널에서 탈출한 직후 느끼는 폭발적인 해방감을 형상화한 것이다. 분출하는 생의 욕구와,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콜라를 주문하는 태연한 얼굴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남편 사망 정식’이라는 농담에는 맛깔나는 연기에 대한 찬사뿐 아니라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느끼는 공감, 해방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이 중첩되어 있다.

<마당이 있는 집>은 GENIE TV 오리지널 시리즈 및 ENA 월화 드라마이다. 2023년 6월19일부터 7월11일까지 방영되었으며, 총 8부작이다. 김진영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방영 초반에 남편 사망 정식으로 온라인상에서 화제 몰이를 했지만, 드라마는 캐스팅이 공개된 직후부터 기대작으로 꼽혔다.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하는 김태희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통해 올해 가장 뜨거운 배우가 된 임지연이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를 관통하는 서사이자, 두 배우가 나란히 서 있는 강렬한 이미지에 입혀진 문장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마당에서 시체 냄새가 난다.” 원작자가 작가의 말에 쓴 것처럼, 문을 열었을 때 복도나 길이 아니라 마당이 있는 것은 부동산에 한 맺힌 한국인들의 ‘로망’이다. 그런데 마당이 있는, 그래서 ‘남들보다’ 안락하고 편안할 것이 분명한 집에서 시체 냄새가 난다? 일상적인 공포와 호기심이 작동한다. 드라마의 공식 페이지는 <마당이 있는 집>을 “서스펜스 가정 스릴러”라고 소개한다. ‘가정’과 ‘스릴러’의 조합. 포브스 미선정, “내 일이라면 상상도 하기 싫지만 남의 일이라면 도파민 폭발하는 장르 톱 3”에 빛난다.

상은이 가난하고 불행한 삶의 상징이라면, 김태희가 연기한 문주란은 모두가 완벽하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삶의 아이콘이다. 교외의 고급 주택에서 살며 남편은 큰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이고 아들 승재는 착하다. 전업주부인 주란은 “먼지 하나 없는 무균실 같다”는 말을 들을 만큼 부지런하고 꼼꼼하게 집을 관리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주란은 이상한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오래전 언니의 시신을 목격한 적 있는 주란에게 익숙한, ‘시체 냄새’이다. 마당을 파봐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주란에게 남편 박재호(김성오 분)는 유기농 비료 냄새일 거라고 설명하며 “당신이 예민해서 그렇다”고 위로한다. 아들과 자신은 아무 냄새도 안 난다는 것이다. 분명 다른 이웃도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말이다.

지속적 세뇌당한 아내, 자신의 판단력 의심하며 갈수록 남편에 의존
시체 냄새 이야기에 “예민” 반복 주입…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통제
용기 갖고 ‘의심의 싹’ 틔우자 거기엔 지배자가 약속한 행복은 없어

이쯤에서 눈치챌 수 있다. 재호는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게 한 후 상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이다. 심리 지배, 정서적 학대라고도 번역되는 이 용어는 패트릭 해밀턴 작가가 연출한 연극 <가스등(Gas Light)>(1938)에서 유래했다. 남편 잭은 가스등을 어둡게 한 후 아내 벨라가 집 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비난하거나 정신병자로 몰아세운다. 벨라는 점점 자신의 인지 능력을 의심하며 잭에게 의존하게 된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재호는 주란에게 수시로 ‘옛날 일로 예민해서 그렇다’ ‘약은 먹었느냐’고 물어본다. 말투와 행동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다. 그러나 재호가 주입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결국 ‘주란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이다. 이웃 해수(정운선 분)가 주란과 친해지려 하자 “우리 집사람, 남들과는 좀 다르다. 모르셨냐, 아픈 사람인 거”라고 말하며 차단한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냄새’는 위험하고 불편한 진실을 은유한다. 주란은 그것을 맡지만, 남편은 주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정한다. 주란에게는 아들 승재 핑계를 대고, 승재에게는 주란 핑계를 대며 두 사람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 한다. 상은이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노골적이고 가시적인 신체적·언어 폭력의 피해자라면 주란은 교묘하고 은밀한, 그래서 간파하거나 벗어나기 어려운 감정적·심리적 폭력의 피해자다.

마당에 시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란의 의심은 사실 재호의 말과 달리 피해망상이나 정신병의 산물이 아니다. 시체 냄새는 주란이 잊고 싶은 과거에 속한다. 끔찍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누구도 침범하거나 꺾을 수 없는 주란 자신만의 경험이자 확신이기도 하다. 바로 그 불행한 고유함이, 남편이 만든 안전하고 보드라운 ‘인형의 집’에서 의심의 싹을 틔운다. 남편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어느 날 불쑥 주란의 앞에 나타난 상은이 “당신 남편이 내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 순간 실체가 된다. 상은은 당신이 맡은 냄새를 나도 맡았다고 말한 셈이다. 당신은 미치지 않았고, 그 의심은 타당하며, 나는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들은 순간 주란의 세계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상은은 마당이 있는 집에 주란이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가, 주란이 매일 윤을 냈던 유리창을 산산조각 낸다.

올봄에 개봉했던 영화 <킬링 로맨스> 역시 가스라이팅으로서의 가정폭력을 소재로 한다. 배우였던 여래(이하늬 분)는 사업가 존(이선균 분)과 결혼한 후, “당신은 48㎏일 때가 가장 예뻐”라는 말을 들으며 언제나 웃고 있는 인형으로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존은 여래에게 비싼 선물 공세를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정하고 신사적으로 굴지만 여래가 시킨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돌변한다. 이런 가스라이팅은 노래 배틀로 표현된다. 존은 늘 H.O.T의 ‘행복’을 부르며 자신은 여래를 사랑하고, 이 모든 행동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래는 그 노래에 세뇌된다. 그런데 여래의 팬클럽이 모여 여래를 응원하는 노래(일명 ‘여래이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여래는 깨어난다. ‘행복’과 ‘여래이즘’이 충돌하는 장면은 가스라이팅의 세뇌와, 피해자를 그 자체로 신뢰하고 지지하는 주변의 존재를 의미한다. 가스라이팅의 핵심은 ‘우리 모두를, 너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드라마 후반에는 오래전 남편의 시신과 함께 발견되어 이웃이 기피하는 존재인 해수 역시 주란과 비슷한 경험을 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감금을 보호라고 인식한 나머지 스스로 그 안에 안주해 버렸던 해수도 ‘겉으로 보기에는’ 부잣집에서 행복한 여자였을 것이다.

주란을 오랫동안 묶어둔 것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세 가족이 안온하게 살아가는 행복의 올가미였다. 그 행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주란의 예민함과 정신적 문제이니, 주란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교정하고 남편의 말에 따라야 했다. 정반대의 축에서, 상은을 위협한 것 역시 행복이었다. 윤범은 상은의 구질구질한 인생이 자신에게 옮는다고 소리치며, “우리도 남들처럼” 살아봐야 한다고, 자기 행동은 모두 그런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윤범이 죽은 후, 상은은 더 이상 남편에게 불행의 원인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며 남편이 사라졌음에도 행복해지지 않는 현실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만큼 윤범이 상은의 삶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으며, 지배는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상실감과 향수마저 느끼게 한다는 것도.

이진송 계간 ‘홀로’ 편집장

<마당이 있는 집>에서 주란은 ‘네가 나 없이 뭘 할 수 있냐’는 말을 뛰어넘어, 위험하고 불완전한 세계로 뛰어든다(여기에는 어떤 찜찜함이 남는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삼가고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상은 또한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를 키우며 자신이 한 일을 잊지 않고, 그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간다. 거기에 지배자가 약속하던 형태의 행복은 없다.

그러나 원작 소설의 말처럼, “우린 모두 다 평범하게 불행”하기에 ‘그럼에도 살아가’는 주란과 상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어떤 용기가 된다.

이진송 계간 ‘홀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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