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 완전정복] 나른한 표정의 미소년들 …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호함'
고전·신화·예술 속 주인공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그려내
쿠바 난민의 아들로 美서 활동
아시아 시장서 폭발적 인기로
작년 100만달러 작가에 등극
'퇴폐미' 오스카 와일드 빼닮아
마이애미서 조수없이 홀로 작업
◆ 미술시장 완전정복 ◆
"정말 슬픈 일이에요! 나는 나이 들어 끔찍하고 추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이 초상화는 영원히 젊음을 잃지 않겠지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질투에 관한 소설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로 불린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이 가진 찰나의 젊음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빠져 초상화를 시기합니다. 화가 배질 홀워드가 그려낸 '도리언 그레이'가 늙고 추악해지기를 광적으로 열망하고 이는 현실이 됩니다.
21세기의 오스카 와일드라 부를 만한 작가가 있습니다. 집요하게 미소년을 그리는 화가, 헤르난 바스(45)입니다. 유미주의(唯美主義)를 외친 나르시시스트였던 오스카 와일드가 그림을 그린다면 바스의 작품과 닮아 있을 것 같습니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미모에 빠진 나르키소스처럼 나른한 표정의 미소년은 화폭에서 관람객을 매혹시킵니다.
바스는 작년 프리즈 서울, 올해 아트바젤 홍콩 등 세계적 아트페어에서 어김없이 대표작을 만날 수 있었던 아시아 최고 인기 작가입니다. 2022년 5월과 11월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연이어 16억원(이하 수수료 포함), 19억원을 찍으며 '100만달러 작가'에 등극했습니다. 시장이 꺾인 올해 3월 필립스 홍콩 경매에서도 13억원의 기록을 썼습니다. 이 작품은 2012년 약 2억8000만원에 낙찰됐으니 10년 만에 5배가량 오른 셈입니다. 지난 5년간 상승률은 311%에 달합니다.
2007년 전후 활황기의 수혜를 받아 20대에 벼락 출세 한 작가가 2008년과 2022년 두 번의 시장 침체를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점은 그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봐도 좋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쿠바 난민의 아들로 태어난 작가는 마이애미에서 자랐습니다. 플로리다 뉴월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명문인 뉴욕의 쿠퍼유니언에 진학했지만 곧 학교를 그만둡니다. 불과 26세 나이에 미국 5대 컬렉터 중 하나인 루벨(Rubell) 컬렉션에 작품이 걸리며 일약 스타 작가가 됐습니다. 그 후 휘트니미술관, 로스앤젤레스(LA) 현대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전시하며 명성을 쌓았습니다.
대부분의 쿠바 난민이 그렇듯이 마이애미에서 주로 지내던 그는 최근까지도 러스트벨트인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했고, 마이애미로 돌아와 리틀 아바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린 시절 자란 곳이자, 운전면허증이 없는 그가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에 스튜디오를 마련한 것입니다.
잘나가는 젊은 스타들이 뉴욕이나 LA로 모여드는 것과 대조적이죠. 바스의 스튜디오에는 앤디 워홀 그림부터 수백 권의 책, 예술품, 심지어 온갖 종류의 플라밍고 자석으로 가득한 벽 등 영감을 주는 사료가 가득합니다. 그림에는 동성애를 상징하는 플라밍고가 자주 등장합니다. 초기에는 빌럼 더코닝의 영향을 받아 추상에 가까운 거친 붓터치가 보였지만, 근작에서는 점점 더 정교한 구상화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미화한 18세기 낭만주의 시대와 낭만적 허무주의, 회의주의, 과잉, 인위성을 불러일으킨 19세기 퇴폐주의의 영향을 받은 바스의 초기 작품은 광대한 다른 세계 풍경 속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 숨겨진 사춘기 소년을 그리곤 했습니다. 최근 작업에선 LGBT 행동주의와 정치, 뉴스, 음모론, 오컬트까지 주제가 확장됐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변치 않는 특징은 고전과 신화·문학·대중문화를 질료로 삼아 연금술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참조할 예술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작업은 매우 구체적인 개념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아이디어를 먼저 검토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초대형 회화를 주로 그리면서 놀랍게도 조수 없이 홀로 작업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일 중독자처럼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TV를 켭니다. 백색소음을 벗 삼아 화폭을 메워갑니다.
한국에서 2012년 PKM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방한했을 때만 해도 전도유망한 청년 작가였습니다. 2021년 스페이스K 서울에서 개인전 '모험, 나의 선택'을 열며 국내에도 '바스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청년과 바다'입니다. 소설 속 소년 마놀린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이름을 새긴 배를 타고 혼자 항해에 나섰습니다. 마침내 노인의 청새치를 잡아먹은 상어를 잡아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의 눈은 공허합니다. 방황하는 청춘의 표상이라 할 법한 그림입니다.
그의 그림은 해석의 여지를 곳곳에 숨겨놓고 '숨은그림찾기'를 유도합니다. 2021년 전시에서 그는 "관람을 마치고 집에 돌아간 이들이 오늘 전시에서 만난 이상한 이야기를 자신의 모험으로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고 설명했습니다. 불안의 상징과 같은 미소년을 그리는 이유도 들려줬습니다.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있는 이들은 어중간한 상태로 자신이 누군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인물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모호함이 중요합니다.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 17일 막을 내린 리만머핀 뉴욕의 6번째 개인전은 2021년 시작한 시리즈 '개념론자(The Conceptualists)'의 두 번째 전시였습니다. 개인전을 할 때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구축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을 그림에 창조해내기 위해서죠. 이 전시에서 그는 홀로 몰입해 사진을 찍고, 꽃을 기르고, 공예품을 만드는 청년에게 '개념 예술가'라는 별명을 붙여줍니다.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소년들은 도리언 그레이처럼 질투로 자멸하지 않고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배질과 달리 바스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셈이죠. 바스의 주름이 깊어질 때 이 소년들도 함께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 변화가 궁금해집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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