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낭만에 ‘풍덩’…자연이 선물한 도심 속 놀이터 ‘호수욕장’[다른 삶]

기자 2023. 7. 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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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광·이은혜의 ‘베를린 육아일기’

아내는 수영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물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물에서 노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수영을 즐기는 친구들도 많고 함께 수영장에 놀러 가기도 한다. 반면 나는 어릴 때부터 물과 친하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 친구들이 수영장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굳이 같이 다니겠다고 부모님을 조르지 않았다. 당연히 지금도 물에 뜨지 못한다.

물과 친한 아내는 베를린에 살기 시작한 이후 줄곧 호숫가에 관심을 보였다. 혼자였으면 평생 갈 일이 없었을 베를린의 호숫가를 아내 덕분에 알게 됐다. 보통 ‘호수’라고 하면 숲이나 공원과 어우러져 멀리서 관망만 하는 조경의 한 요소로만 생각하지만 베를린의 호수는 ‘자연이 만든 수영장’이다.

이곳에는 특정 기간 동안 수영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호수의 야외 수영장, 굳이 표현하자면 ‘호수욕장’이 있다. 그곳에 가면 많은 사람이 너무나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법으로 호수를 즐긴다. 물론 모든 호수가 해당되진 않는다. 베를린시에는 호숫가 수영장 총 43개가 있는데 수영이 가능한 곳은 20개로 시 전역에 걸쳐 있다.

수영을 할 수 있는 호수는 정기적인 점검을 통해 수질을 유지한다. 베를린시에 있는 호수에서 공식적으로 수영이 허용된 기간은 5월15일부터 9월15일까지다. 이 넉 달 사이일지라도 정기 수질 검사에서 수영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이 나오면 수영을 금지하기도 한다. 그러니 수영을 할 줄 안다면, 그리고 베를린에 머무는 시기가 5월부터 9월 사이 여름이라면, 호수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가족이 가장 자주 방문하는 호수는 크루메 랑케(Krumme Lanke)다. 이곳은 베를린 지하철 3호선의 남서쪽 종점이다.

역에서 숲속으로 1㎞ 정도 걷다 보면 호수가 보인다. 이 호수는 동서로 기다란 바나나처럼 생겼다. 덕분에 호숫가 모양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서 사람들은 조깅과 산보를 하며 자전거도 탄다.

대부분 여유롭게 이곳을 즐긴다. 무언가 대단한 장비나 복장을 걸치기보다는 동네에 슬리퍼를 신고 산책을 나온 듯 느슨한 모양새다. 산책로 중간에는 비어가르텐(Biergarten)이 하나 있다. 간단한 먹거리도 있지만 말 그대로 맥주 한잔 야외에서 즐기는 장소다.

날씨가 좋은 여름날이면 호숫가 저 멀리 맨발로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이미 집에서부터 수영복만 입고 나선 사람들, 햇볕을 쬐기 위해 잔디밭에 누운 사람들을 으레 볼 수 있다. 조그마한 튜브를 들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어르신들, 무리 지어 놀러 온 20대들, 여러 세대가 섞인 가족 단위 방문객들도 자주 마주하곤 했다.

물과 친한 아내 덕분에 만난 호수의 야외 수영장…5월~9월 수질검사 통과한 구역에서만 물놀이 즐길 수 있어
날씨 좋은 여름날 수영복만 입고 나선 이들과, 햇볕 쬐려 잔디밭 누운 사람들…여러세대 섞인 가족단위 방문객도 자주 마주치게 돼
호숫가에 모여 앉아 하하호호 즐거운 20대 무리처럼, 우리 아이도 자연 속 낭만을 누릴 줄 아는 청춘으로 성장하기를

한국에서 가족 모임 하면 그저 미식을 위한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족들끼리 모두 만나 호숫가에서 수영을 즐긴다니, 처음에는 참으로 ‘유럽스럽다’ 싶었다.

얼마 전 휴일에 가족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호수로 향했다. 조용히 생각에 빠진 사이, 저 멀리서 연신 ‘풍덩’ 소리가 들린다. 제법 높은 나무 위에서 깔깔거리며 다이빙을 하는 무리다. 보통 호수에서는 제대로 된 수영을 하는 사람보다 유유자적 두리둥실 떠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한가롭게 물 위에 누워 휘휘 팔을 저으며 떠다니는 어르신을 보며 평화로움과 여유를 느꼈다. 어르신은 한 바퀴 돌고 나와서는 한참을 앉아 있다 다시 들어가길 반복했다. 가끔 간식을 먹기도, 읽다 만 책을 이내 다시 보기도 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평화로운 도시의 호수를 즐긴다.

어쩌면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풍경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와 데이트를 하면서 베를린 호숫가를 처음 가봤으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아내는 날씨 좋은 베를린의 여름이면 하루가 멀다고 아이와 호수로 향한다. 가벼운 차림으로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기는 정도가 준비의 전부다.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지만, 인공적인 수영장 시설은 드물다. 이렇다 할 샤워시설은커녕, 이동식 화장실조차 없는 곳이 많다. 맨발의 슬리퍼 사이로 흙이 스며드는 것은 예삿일이다. 어릴 적 장마철 놀이터에서 놀 때처럼 익숙해져야 한다.

수영이 가능한 호수에 대한 정보는 베를린시 홈페이지(badestellen.berlin.de)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상에 각 호숫가 위치는 물론 수질과 함께 수심, 수온, 화장실이나 주차시설, 식당, 카페, 휠체어 및 반려견 입장 가능 여부, 수상구조 시스템이 갖춰졌는지 등의 정보가 공개돼 있다. 대장균, 유해 조류 등이 기준치 이상 검출된 곳은 입욕 금지로 표기한다. 호수 수질에 대한 평가 이전에, 호수 일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시민들은 충분한 안정감을 느낀다.

첫째 아이는 다행히 물을 좋아하는 엄마 덕에 어릴 때부터 물과 꽤 친하게 지냈다. 실내 수영장부터 집 근처 호숫가까지 두루두루 다니곤 했다. 아직 제대로 된 수영에 대한 개념은 없지만 물에서 첨벙첨벙 노는 것을 좋아한다. 올여름엔 아내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실내 수영장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물놀이를 좀 해본 사람이라면 ‘캐리비안 베이’와 ‘88 체육관’을 떠올릴 것이다. 베를린도 도심에서 제법 떨어진 대규모 실내 수영장부터 동네 복합체육시설에 붙어 있는 수영장까지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깔끔하다 못해 정갈하기까지 한 시설에 탈의실과 샤워장, 물론 각종 식당가까지, 온종일 물에서 노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돼 있다. 1인당 입장료로 전부 해결된다.

편리함이라는 단어로 물놀이를 정의한다면 사실 호숫가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멀리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시내 가까운 곳에서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호숫가는 확연히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물과 친하게 지낼 자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쁜 일상 틈틈이 즐길 수 있는 도심 호숫가는 확실한 베를린의 매력이다.

호숫가에 모여 앉아 하하호호 즐거운 20대 무리를 보며, 이와는 너무 달랐던 나의 20대를 떠올렸다. 우리 아이도 이곳에서 자란다면, 저런 기억을 가졌으면 하는 기대를 해보았다. 컴컴한 대도시의 지하 술집에서 알코올에 취하는 것이 아닌, 친구들과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며 자연 속에 깃든 낭만을 누리는 청춘의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신혜광·이은혜

현재 베를린에 거주 중인 3인 가족이다. 닭띠 아빠는 건축설계사무실에 다니고, 돼지띠 엄마는 그림을 그리고, 돼지띠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단독주택에 사는 것, 자동차로 베를린에서 나폴리까지 여행하는 것이 꿈이다. <스페인, 버틸 수밖에 없었다>와 <어느 멋진 일주일, 안달루시아>를 쓰고 그렸다.

신혜광·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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