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물론, 국가 흥망성쇠도 변화무쌍한 '금융'이 좌우한다
부동산만 사들여 돈 남아돌아
금융업 발전 못시켜 쇠락의 길
혁명 이후 수립된 프랑스 정부
재정수입 없어 결국 위기 봉착
유럽국가들 美서 전쟁차관 써
1차 세계대전 진짜 승자는 미국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가장 유명했던 금융업자는 노예 출신 파시온이란 남성이었다. 파시온의 재산은 500달란트였다. 당시 1달란트가 황금 400㎏ 가치를 가졌다고 하니 그의 재산은 한 나라의 재정수입과 맞먹을 정도였다. 파시온 같은 금융업자들은 상인과 시민에게 돈을 빌려줬고 이자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신전 사제까지 대금업에 뛰어들던 시대였다. 당대 종교인들은 신도들이 제물로 바친 돈을 밑천 삼아 대금업을 겸업했다. 이렇듯 금융이 발달하면서 돈 꾸기는 쉬워졌지만 아테네 시민의 부채는 치솟았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는 노예가 됐다. 정치가 솔론은 "병역 의무를 다하는 시민계층이 사라지면 아테네 방어를 맡을 군대가 사라진다"며 하루아침에 채무를 전액 탕감하는 초강수까지 썼다. 아테네의 존속과 패망이 금융에 달려 있음을 솔론은 간파했다.
신간 '세계사의 향방을 가른 금융의 힘'은 인류의 3000년 역사를 되짚으면서 금융이 국가 흥망의 배후였음을 입증하는 교양서다. 신화의 제우스가 불행과 행복을 섞어 세상에 보냈듯이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금융이 인간의 행불행을 결정했다고 책은 말한다. 로마인에게 약탈은 부를 허락하는 자금줄이었다. 축적된 부가 로마 시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됐던 건 아니었다. 빼앗은 재산은 대개 귀족이 차지했고 로마 귀족은 부동산부터 사들였다.
로마에서도 부동산 투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하지만 로마 귀족은 부동산 투자 말고는 넘쳐나는 돈으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저자는 로마가 금융업을 발전시키지 못해 쇠락했다고 평한다.
중세 시대 백년전쟁에서 벌어진 전투의 승패를 가른 건 돌진하는 병사의 용감무쌍함이 아니라 바로 돈이었다. 116년 걸린 백년전쟁의 최종 승자는 프랑스였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 첫 번째 싸움은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였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3배에 달하는 기병대를 거느렸다. 하지만 유효 사거리가 360m인 영국 장궁부대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프랑스 기병을 화살 몇 발로 박살냈다. 프랑스군 1500명이 사망하는 동안 영국군 사망자는 100명 미만이었다.
프랑스군이 장궁부대를 확보하지 못했던 이유는 장궁병을 고용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왕실은 고리대금업자를 탄압했고 '주술로 사람을 속인다'는 죄목까지 붙여 사형시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프랑스에선 신용을 담보로 자금을 대줄 금융업자가 양산되지 못했다. 프랑스 왕실은 군자금이 필요하면 일반 국민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자를 지급하기는커녕 못 갚을 상황이 되면 세금으로 때웠다. 신용대출 체계를 철저하게 갖춰 업자에게 연이자 13%를 지급했던 영국 왕실과 대조적이었다.
네덜란드 도시 암스테르담의 운명도 금융이 결정했다. 유럽 대다수 상선이 암스테르담을 지나갔다. 수표를 통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대금업자와 차용인 정보가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됐다. 유럽 최초의 종이 화폐가 등장한 도시도 암스테르담이었다. 암스테르담은 국제무역 중심지로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은 바로 그 금융 때문에 경쟁에서 밀려났다. 유럽 국가들은 폴란드 남서부 슐레지엔이란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1756년부터 7년간 둘로 쪼개져 피 터지게 싸운 적이 있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참전국을 상대로 돈을 빌려줬는데 대출금은 보유 현금의 15배에 육박했다. 이자도 받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자 현금 대량 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43개 은행이 파산했다. 책의 저자는 암스테르담이 이때부터 패권 경쟁에서 뒤처졌다고 본다.
혁명에도 돈이 필요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수립된 프랑스 제1공화국(혁명정부)은 정상적 재정수입이 없어 위기에 봉착했다. 1792년 밀가루 가격이 1.5배쯤 폭등한 데 이어 소고기, 달걀, 버터 가격이 3배 올랐다. 더 잘 먹고 더 잘살기 위해 혁명을 했는데 모두가 더 못 먹고 더 못사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생활 안정을 위해 실시한 최고가격제도 효과가 없었다. 저자는 이후의 혁명 과정이 더 과격해진 이유로 재정수입 부족을 꼽는다.
유럽에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의 진짜 승자는 유럽 내 국가가 아닌 미국이었다. 세계대전은 금융 대결의 장이었다. 당시 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의 총군사비는 2080억달러였다. 이는 영국·독일·프랑스 전 국민의 전쟁 직전 총재산을 합친 액수에 준했다. 연합국은 전쟁 비용 중 절반을 미국의 차관을 통해 충당했다. 승리의 면류관은 미국에 돌아갔다.
저자는 3000년의 역사를 이렇게 줄여 말한다.
"국가가 강성하면 화폐는 경제의 동맥이 되고 가장 효율성이 높은 곳으로 흘러간다. 반면 국가가 쇠퇴하면 금융은 국민의 부를 약탈하고 화폐는 소수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책은 "샘이 마르면 땅바닥에 드러난 물고기들이 서로 물기를 뿜어주고 거품을 내서 적셔주지만 호수에서 물 걱정을 잊고 살던 때와 같을 수는 없다"는 장자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다. 금융은 인류가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터전이란 얘기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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