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영의 쫌아는 언니] '호구되기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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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 잔 아침 이를 닦다가 갑자기 보이는 모든 것이 구차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부류를 '호구'라고 부른다.
와중에 호구력이 진화도 한다.
잊을 만하면 귀에 꽂히는 호구 저격 돌림노래는 닳고 닳은 칭찬 일색의 가사와 자존감을 자극하는 호소력 짙은 멜로디로 시작돼 빈틈없이 귀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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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안은영 작가 = #1. 장마
늦잠 잔 아침 이를 닦다가 갑자기 보이는 모든 것이 구차해지기 시작했다. 계획했던 아침 스케줄이 엉키면서 맥이 빠진 탓일 수도 있고 어젯밤 간만에 마신 와인으로 숙취가 쌓인 탓일 수도 있다.
요 며칠 나이지지 않던 기분은 얼룩덜룩한 세면대, 먼지가 보오얀 창틀, 맨발에 티끌이 밟히는 거실 바닥 때문에 더더욱 우울해지고 말았다. 어수선한 집안 풍경은 옛날 카메라 속 흑백필름처럼 내 인생의 우울한 단면을 찍어놓은 파노라마 같았다.
몸을 움직이는 게 좋겠어서 청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밖에는 길고 굵게 비는 중이다. 어찌나 귀찮던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청소기 손잡이를 내려놨다. 양심상 환기라도 하려고 창문을 열자마자 빗줄기가 들이쳐 순식간에 물이 흥건했다. 수건을 가져다 닦는데 수건에서 큼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 이 아니라 실제로 냄새가 났는데 며칠 전 습한 날씨에 잘못 말린 바로 그 수건이었다. 새 수건으로 바닥을 닦은 뒤 에어컨을 제습으로 돌리고 보리차를 컵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컵을 입에 대는 순간 손에서 수건의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손을 씻으면서 이참에 수건을 몽땅 교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모든 게 구차해졌다. 유치한 가사의 돌림노래를 들으면서 굽이굽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기분이다. 노래는 끝나지 않고 나는 벌써 지쳤다. 문제는 아직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일어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하루를 다 쓴 기분, 계절은 어언 장마의 한복판.
#2. 호구의 노래
이런 사람이 있다. 귀가 얇아 남의 말에 금세 혹한다. 인정욕구가 넘쳐 잠자리 날개처럼 얄팍한 칭찬에도 곱씹어 감격한다. 영민하지 못해서 그 사람의 좋은 의도만을 생각하고 훗날을 예비하는 법을 모른다. 이용당하는 순간에도 제가 이용당하는 줄 모르고 자못 똘똘하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포인트다. 사람들은 이런 부류를 ‘호구’라고 부른다.
이 정도의 요건을 갖추려면 평소 언행이 헐렁하고 야무지지 못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호연지기와 카리스마, 나아가 부러워할만한 매력의 소유자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와중에 호구력이 진화도 한다. 다신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로서 피해의식이라는 것이 생기고 합리적 의심의 시간도 갖는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반면교사라는 것도 해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중력과 함께 되감기는 요요처럼 호구의 원점으로 돌아간다. 향상된 것이 있다면 호구되기의 과정이 길어졌다는 것과 배반의 상처가 비교적 빨리 아문다는 것.
오랜만에 누군가(들)의 호구로 한 철을 보냈다. 나름 진화한 호구력 덕분에 머릿속에 ‘호구짓 금지’ 사인이 금세 켜지긴 했지만 한동안 실소와 우울의 쌍곡선을 타야했다. 요즘은 상대의 문제라기보다 내 생각의 구조에 대해 생각중이다. 개인, 관계 같은 것에 집착하는 내 사유의 방식에 문제는 없었을까. 일을 협의했다면 결과는 누구의 탓도 아닐 것이었다. 이런 방향으로 생각을 잇다보니 감정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야말로 관계건 일이건 어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정리가 됐다.
이제 되돌이표를 끊어내는 일만 남았다. 잊을 만하면 귀에 꽂히는 호구 저격 돌림노래는 닳고 닳은 칭찬 일색의 가사와 자존감을 자극하는 호소력 짙은 멜로디로 시작돼 빈틈없이 귀에 파고든다. 이제 어둑한 집안에 불을 켜고 먼지와 얼룩들을 닦아내야지. 빗물에 녹은 창틀 먼지를 닦고 호구의 노래로 눅눅해진 귀를 씻어야지. / 안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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