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전쟁·혁명···근현대사 빗댄 ‘똬리나무’[책과 삶]
입헌군주제 11~12세기 식물학자 얀코의 비망록
유럽 대기근·미국 대공황·광주항쟁 등 녹여
지하 정원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436쪽 | 1만7000원
홍준성의 전작 <카르마 폴리스>(2021)는 철학, 역사, 문학, 신화를 아우른다. 소설가이자 철학도인 홍준성은 칸트,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이나 셰익스피어, 괴테, 카프카 같은 문인들의 책 내용을 인용하거나 변용했다. 출처를 밝힌 미주만 164개다. 배경 도시 ‘비뫼’에 관한 묘사는 프리드리히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 나온 런던을 참조했다.
신작 <지하 정원>은 ‘비뫼 연대기’의 두 번째 작품이다. 시공간은 <카르마 폴리스>에서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비뫼시다. 여성 식물학자 얀코의 비망록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비뫼 지하 ‘똬리나무’에 관한 진실을 찾으려는 얀코의 추적기를 중심축으로 입헌군주제하 기아, 학살, 전쟁, 혁명 같은 시대사를 엮어낸다.
‘기적이 사라진 해로부터 1083년’(이하 연도만 표시) 이후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가난한 사람들만 죽었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불이 났을 때 감독관이 혼자 탈출하는 바람에 어린 여공들만 불에 타 죽었다. 사람들은 주거안정기준법이 의회에서 잠자는 동안 가스중독으로도 죽었다.
식량 가격도 폭등한다. 지배계급은 “빈민들의 위 사정에 지나치리만큼 무신경”했다. 위정자나 관료들의 “인명 경시가 하나의 유행”처럼 굳어진다. 이들은 “마치 인구수를 줄여서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듯 사람들을 죽인다.
빈민들은 권력자들과 싸운다. 그중 가장 유명한 빈민 저항 조직은 ‘풀무형제단’이다. 1092년 4월 로벨토 거리의 곡물관리청을 점거한다. 권력자들은 계엄군을 내보내 진압한다. “1092년 식량 폭동 진압은 갑작스러웠고, 그렇기에 잔혹했다.” 이때 주인공 얀코의 아버지 두코도 죽는다. 그다음 달 얀코는 몬세라토 수도원 부속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고아들은 “일종의 실험 재료이자 상품”이다. 귀족들은 고아원을 순례하며 “혈통이 좋은 강아지들 중 하나”를 고르듯 사 갔다. 얀코는 ‘하인학교’를 거쳐 한 귀족 집안에 팔려 간다. 1102년 대학에 들어간다. 귀족 자제의 학위를 위해 대입 자격시험을 대리 응시하고, 대신 공부까지 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죽던 때 발견된 똬리나무의 정체와 진실을 밝히려 한다.
1092년 계엄군이 풀무형제단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간 곳이 똬리나무였다. 로벨토 거리 지하철 공사현장 지하에서 비뫼시를 떠받치는 거대한 똬리나무가 발견됐다. 이 나무는 이상했다. 발견 이후 주변에선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맨홀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황화수소에 중독됐다. 1106년까지 지반 침하와 균열에 따른 땅 꺼짐 현상이 빈번하게 이어진다.
발견 당시 똬리나무가 유적인지, 화석인지, 생물인지 알 수 없었다. 똬리나무는 “생물학의 기본 법칙들을 모조리 무시”한 것이었다. 단면에 나이테도 없었다. “물푸레나무를 연상시키는 넓은 잎사귀가 있되 그 색감은 거뭇했고 몸통은 생강과 같은 뿌리줄기”로 보였다. 줄기는 죽은 나무처럼 퍼석퍼석했다. 햇볕이 없는 지하에서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자라났는지도 의문이었다. 과학보다는 전설로 설명하는 게 나았다. “혼돈을 뿌리로 감싼 뒤 그것을 양분 삼아 지상과 하늘”을 떠받치는 나무 말이다.
‘똬리나무’는 정식 학명도 아니었다. 현장에 있던 조사대원 중 하나가 “밑바닥에 이런 게 똬리를 틀고 있었네!”라고 말한 것이 괴생명체의 이름처럼 굳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똬리나무가 비밀무기라는 음모론도 퍼져나간다.
소설은 미국 대공황과 실업 사태, 유럽 대기근에다 프랑스혁명, 공산혁명, 광주항쟁 같은 근현대사 여러 사건을 녹였다. 소설 속 ‘7월 대학살’이 벌어진 1097년 묘사는 다음과 같다. “군대는 각지에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이어서 기병대까지 돌진시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발포 명령을 거부한 군내 소신파들도 있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평등당 보고서에선 이날 80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했고 정부 측에선 1300여명이라 기록했다.”
소설은 “국방비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지”하려는, 즉 “이념을 넘어선 전쟁이라는 연대”로 묶인 전쟁 국가의 문제도 다룬다. 비뫼시 원로원은 “징병제를 실시하면 실업률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고 창고에 쌓인 무기들을 소비할 수 있었으며 또한 점령지의 동산들을 팔아서 채무를 갚을 수” 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주창한다. 입헌군주제, 의회 타도와 공화국 건설을 내세운 반란군도 등장한다.
홍준성은 전작에서처럼 사상가들의 생애와 철학을 변용한다. 한 예가 마르크스다. “금서 목록의 맨 꼭대기에 이름을 올린 어느 위험천만한 사상가는 공장의 기계들을 두고 ‘흡혈귀’라고 했다. 혼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오롯이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은 뒤에야 뜨거운 증기를 뿜어대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뫼시의 산업들은 살아 있는 석탄들, 결국엔 석탄 찌꺼기로 허공에 휘날리게 될 뜨내기들을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홍준성은 부산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세부 전공은 발터 베냐민이다. 비망록 형식 소설엔 철학적 아포리즘을 많이 넣었다. 얀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이어낸다. “뇌는 유지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말을 해도 배고픈 시대에 언어는 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를 잃으면 그 언어로 이뤄진 세상도 잃게 된다.”
“지배계급의 견적서엔 체제를 바꾸는 것보다 폭동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더 저렴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빈민들의 기억은 위 속에 기거하는지라, 허기가 채워지는 것만큼 투사들에 대한 기억은 창자로 밀려났다가, 끝내는 대변이 됐다.” “인간들은 언제나 탓할 거리를 필요로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느니 그 세계의 멸망을 택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족은 딱 두 가지뿐인데 그건 바로 부자와 빈자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허상이자 종교란 말이 덧붙여졌다.”
소설은 여러 측면에서 실험적이다. 내용은 연대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홍준성은 기자와 통화하며 “자기 인생을 되돌아볼 때 시간순으로 떠올리지는 않는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얀코)의 메모라는 걸 의도했다”고 말한다.
전작 <카르마 폴리스>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 1인칭 비망록 형식을 두고 “신의 시점에서 인간과 사회 전체를 조망하려는, <카르마 폴리스> 때 시도가 허위의식처럼 느껴졌다. <지하 정원>에선 철저하게 개인 시선인 비망록 형식으로 (인간과 사회를) 읽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철학적 아포리즘’에 대해 “작가의 생각과 주제를 직접 드러내 밀고 나가는 실험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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