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3. 고려 수군, 동여진 해적들과 일전을 벌여 대마도인 포로들을 구출하다

최동열 2023. 7. 1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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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수군이 원산 남쪽 앞바다에서 동여진족 해적선과 싸워 해적들에게 끌려가던 일본인 포로들을 구해 돌려보냈다는 고려사 현종 10년 4월 29일자 기사.(규장각 소장본)

13. 고려 수군, 동여진 해적들과 일전을 벌여 대마도인 포로들을 구출하다

■고려 수군, 원산 인근 해전에서 여진족 격퇴

-동여진족 귀로 막고 일전 불사

-적선 포획 및 잡혀가던 일본 포로 수백명 구출

1019년 대마도를 초토화하고, 일본 본토인 규슈까지 공략한 동여진족들은 무사히 동북지방 본거지로 귀향했을까. 답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그들이 동해상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하는 등 귀로가 험난했다고 전한다. 그들을 막아선 것은 고려 수군이었다. 고려사 현종 10년(1019년) 4월 29일 기사에는 고려 수군이 동여진족과 일전을 벌여 잡혀가던 일본 포로들까지 구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명(鎭溟)의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의 배 8척을 포획하였다. 해적에게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 남녀 포로를 구해 259명을 그들 나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진명’은 원산시 남동쪽 해안지역, 영흥만의 서곡천 하류와 갈마반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니 고려 수군과 여진족이 일전을 벌인 곳은 원산 남쪽 바다로 확인된다.

▲ 대마도 이즈하라항의 현재 모습.

대마도 기록에도 ‘도이(刀伊)の적(敵)’, 즉 야만의 오랑캐들에게 잡혀가던 남녀 포로 다수를 고려 수군이 구출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지난 2007년 필자가 대마도 현지를 취재할 당시 인터뷰를 한 오오모리 키미요시(大森公善)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장은 “대마도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동여진족들이 동해상에서 고려의 수군을 만나 격전 끝에 패퇴하고, 다수의 일본인 포로가 구출돼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 측 기록인 쇼유키(小右記)에 더 자세히 기술돼 있다. 기록에는 당시 가족과 함께 포로가 됐다가 혼자 탈주에 성공한 대마도 판관대(判官代) 나가미네노 모로치카(長岑諸近)를 비롯 여성 포로들의 증언이 나오는데, 여진족의 만행과 고려 수군의 전함 규모 등이 상세히 언급돼 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여진족은 대마도를 치고 돌아가는 중에도 고려 연안에 상륙해 약탈을 일삼고, 남녀를 잡아갔으며 노쇠한 사람들은 바다에 던져 버리는 등의 만행이 극심했다.

▲ 여진족 침입과 고려국의 구조 내용에 대한 대마도 기록.

이들 여진족을 패퇴시킨 고려 수군의 전함은 크기가 매우 큰 이중 구조였고, 위쪽에는 노를 좌우에 각각 4개씩 배치하고 아래쪽에도 노를 걸었는데, 한쪽 7∼8개씩이 있었다. 배의 중간은 여러 도구와 무기들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무기는 철갑옷과 크고 작은 칼, 삼지창 등이 언급됐다. 전함의 앞쪽 이물에 철로 만든 뿔을 달아 두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여차하면 적선을 들이받는 충격전도 즐겨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불붙은 화석(火石)을 대포처럼 쏘아 멀리 떨어져 있는 적선을 불태우는 전법도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승선원은 1척당 25∼30여명 규모로 확인된다.

당시 가족과 함께 끌려가다가 단신으로 탈주해 돌아온 대마도 판관은 어머니와 처자식을 찾고자 도해(渡海) 금지령을 어기고 고려 김해부(金海府)로 갔지만, 가족들이 이미 동여진족에게 살해된 뒤였다. 한때 일본 측은 대마도에 침입한 정체불명의 무리가 고려인들일 가능성을 의심했으나, 귀국한 대마도 판관이 고려에서 보고 들은 동여진족의 정체와 고려 수군에 의해 구출된 일본인 포로들에 대해 조정에 보고하면서 실상을 알게 됐다.

마치 유럽의 바이킹처럼 기세등등하게 바다를 휘저었던 여진족들이 귀로를 막고 기다리고 있던 고려 수군을 만나 호되게 당하고, 포로까지 뺏기는 상황을 맞았으니 당시 이들이 돌아가는 뱃길을 막고 있다가 일전을 벌인 고려 수군의 역량 또한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만 하다.

■거란, 여진족 제압한 고려-동북아 강국 우뚝

-거란, 일본에서도 하례

▲ 고려 문종 연간을 전성기라고 한 고려 후기 문신 이제현의 찬술. 고려사 권9 세가편 수록.(국사편찬위원회)

사실 11세기에 여진족들이 울릉도에 이어 대마도를 초토화하고 일본 규슈지역까지 공략하는 동시에 동해안 도처를 노략질하면서 요즘 말로 환동해권 전역이 공포에 휩싸이자, 고려는 대응을 위해 동해안 수군 체제를 대폭 개선한다. 사서를 살펴보면, 이즈음 고려가 강원도 해안지역에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를 설치하는 등 동해안의 수군 무력을 대폭 강화하고 간성, 명주, 고성 등의 성을 대대적으로 새로 쌓거나 보수했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런데 11세기를 관통하면서 동해바다를 유린한 동여진족들은 12세기에 들어서는 갑자기 바다에서 자취를 감춘다. 고려가 저 유명한 윤관 장군을 투입, 대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여진족 정벌에 나서 함경도 일원의 동북영토를 새롭게 개척하고, 9성을 쌓는 등 북방의 무력을 한층 강화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1세기 초 거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에 이어 12세기 초 여진 정벌로 골칫거리였던 북방이 안정되면서 고려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당시 고려의 사회·경제적 안정과 동북아 세계에서의 위상은 후일 고려 후기의 문신 이제현이 문종 임금 재위(1046∼1083년) 연간을 찬술한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권9 세가편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면, ‘이때는 가히 전성기라 이를 만하다. 문종은 몸소 절약에 힘쓰고, 현명하고 재주 있는 자를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였다. 또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했다. 권력을 측근에게 넘기지 않았으며, 비록 인척이라도 공훈이 없으면 상주지 않고, 좌우의 총애하는 사람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처벌하였다. 쓸모없는 관원을 줄여서 일을 간단하게 하고, 비용을 절약해 나라를 부유하게 하였다. 대창(大倉)의 곡식이 넘치도록 쌓였으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불렀다. 송(宋)나라에서는 매양 왕을 포상하는 글월을 보내왔으며, 요(遼)나라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동쪽의 일본(倭)은 바다를 건너와 진귀한 보물을 바쳤고, 북쪽 맥인(貊人)은 관문을 두드려 토지를 얻어 살게 되었다.(하략)’ 북쪽 거란의 요나라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그때 진귀한 보물을 바칠 정도였다니, 거란과 동여진의 무시무시한 야만적 횡행을 물리치고, 동북아의 강자로 우뚝 선 고려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참고=기사에 인용(참고)된 논문과 책, 인터뷰 직함은 논문 발표와 책 발간, 인터뷰 당시의 근무처와 직책을 준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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