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해군서 쫓겨난 성소수자의 반전...그 이름 딴 군함, 바다 누빈다

정지섭 기자 2023. 7. 14. 08: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설적 성 소수자 인권 운동가 이름 딴 최신식 급유함 ‘하비 밀크함’ 해군에 인도
’무지개 깃발’ 탄생 주역. 시의원 당선 10달 만에 암살돼
오바마 행정부서 최고훈장, 우표 헌정되고 급기야 이름 딴 군함까지

성적 지향성 때문에 해군에서 쫓겨났던 미국의 전설적 성 소수자 인권 운동가의 이름을 딴 미 해군 군함이 취역해 바다를 누비게 된다. 이 영화 같은 반전 스토리의 주인공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는 처음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암살로 삶을 마감한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하비 밀크(1930~1978)이다. 미 해군과 미국의 조선업체인 제너럴 다이내믹스 나스코는 11일(현지 시각) 샌디에이고에서 최신식 급유함 하비 밀크함의 인수·인도식을 진행했다. 미 해군이 작전 중 급유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도입한 존 루이스급 급유함 중에서 실전에 투입되는 두번째 배다.

최근 제너럴 다이내믹스 나스코에서 건조돼 미 해군으로 인도된 최신식 급유함 '하비밀크함'. /USNI. General Dynamics NASSCO

전장 226m로 15만7000배럴의 연료를 싣고 시속 37㎞로 달릴 수 있다. 바다에서 작전 중인 공격함에 신속하게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 핵심 업무다. 앞서 이 군함은 2021년 11월에 하비 밀크함으로 공식 명명됐으며, 해군의 검수절차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제 실제 임무에 투입되는 공식 취역식만 남았다. 보통 미 해군 군함에는 전설적 무공을 세우거나 타의 모범이 된 군인이나 미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대통령 등 유력 정치인, 또는 지명의 이름이 붙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성 소수자 인권 운동가, 그것도 해군과 악연으로 엮인 인물의 이름을 붙인 배경이 주목받고 있다.

커밍아웃 동성애자로는 처음으로 선출직 의원이 된 하비 밀크가 1978년 1월 샌프란시스코 주의회에서 취임선서를 하기 전 청소년들과 함께 한 모습. /Harvey Milk Foundation

하비 밀크는 1930년 뉴욕주 우드미어에서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체육과 음악, 작문 등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했던 그는 교사를 꿈꾸며 뉴욕주립사범대학에 진학했다. 해군으로 복무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51년 해군에 입대했다. 그의 복무기간은 미군이 6·25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와 겹친다. 그는 장교과정 수료후 샌디에이고에서 다이빙 교관으로 복무했다. 1954년 해군은 그의 성적 취향과 행동을 문제삼아 자진 제대를 요구했다. 자진 제대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고, 군인으로서의 권익이 박탈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그는 1955년 1월 군복을 벗었다.

지난 11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하비밀크함 인수 및 인도식. /General Dynamics NASSCO

형식상으로는 자진 제대였지만, 사실상 퇴출이었다. 이후 교사와 통계전문가, 카메라점 주인 등을 전전하며 힘겹게 생활전선에 나선 그는 1960~70년대 미국 사회에 거세게 휘몰아친 민권운동 열풍과 마주하며 성 소수자 인권 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돼 1978년 1월 취임했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는 처음으로 선거에서 당선돼 기성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미국 사회가 주목했다. 하비 밀크는 성 소수자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무지개 깃발을 고안한 주역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1978년 6월 예술가 길버트 베이커에게 “우리를 위한 ‘새로운 자부심의 상징’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단숨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한 그의 삶은 그러나 다섯 달 뒤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던 2014년 미 우정사업본부가 하비 밀크 우표의 시안을 공개하고 있다. /Harvey Milk Foundation

1978년 11월 27일 전 샌프란시스코 관료인 댄 화이트가 샌프란시스코 시청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시장실로 들어가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던 조지 모스코 시장을 저격했다. 이어 밀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성 소수자 인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온 모스코 시장은 밀크의 든든한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두 사람의 피살 소식이 들려온 그 날 밤 시청 주변은 추모의 촛불을 들고 온 시민들로 발 디딜틈 없었다. 밀크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2008년 할리우드 영화 ‘밀크’에서 하비 밀크 역을 맡았던 연기파 배우 숀 펜은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최신식 급유함 하비 밀크함의 사진을 넣은 기념물. /General Dynamic NASSCO

성 소수자와 소수 인종 권익이 획기적으로 신장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하비 밀크는 동성애 인권의 아이콘으로 격상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9년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밀크에게 사후 수여했다. 2014년에는 미국 우정사업본부에서 그의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오바마 행정부 마지막 해인 2016년 해군은 작전중 급유 능력을 극대화한 최신식 ‘존 루이스급 급유함’ 건조 계획을 발표했다. 존 루이스(1940~2020)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등과 동시대에 활동하고 하원의원으로 30여년을 활동했던 흑인민권운동가다. 이 급의 첫번째 배인 존 루이스함이 2021년 1월 취역했고, 이번 하비 밀크함이 두번째다. 그는 비록 불명예스럽게 군 경력을 마쳤지만, 평소에 군 복무 경력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2003년 2차 이라크 전쟁 당시 미 해군 급유함이 걸프 해상에서 급유임무를 수행하는 모습. /U.S. Navy

하비 밀크함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법원장 중 한 명의 이름을 붙인 얼 워런함이 현재 건조 중이다. 이후에는 정치명문가 케네디가의 일원인 로버트 F 케네디 전 법무장관, 19세기 백인과 흑인을 대표했던 여권 운동가인 루시 스톤과 소주너 트루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연방 대법관 서굿 마셜,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진보 성향 여성 대법관으로 2020년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의 이름을 딴 급유함이 차례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