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죽인 청년이 연극의 주인공이라면?…연극 '테베랜드'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청년 마르틴과 한 남자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감옥 안에서 농구를 즐기는 마르틴은 그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이 남자는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존속 살해를 주제로 연극을 만들고 있는 극작가 S다. 그는 왜 아버지를 살해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을 구상하는 것일까.
지난 달 28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연극 '테베랜드'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작품은 S가 여러 질문을 통해 무대에 오를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S의 물음은 마르틴의 성장 배경에서 시작해 살인 도구와 동기 등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아버지를 살해한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 등장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언급하며 존속 살해의 본질을 논하기에 이른다. 극의 제목도 오이디푸스가 살았던 도시 테베에서 따왔다.
살인을 저지른 동기를 집요하게 캐묻는 극작가와 질문에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을 내놓는 살인마의 심리 대결이 미묘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내내 자신에 관한 질문을 받던 마르틴은 S에게 연극을 만드는 의도가 무엇인지 강하게 따져 묻기도 한다. 두 사람의 대화가 깊이를 더할수록 관객은 자연스럽게 극에 몰입하게 된다.
이 작품은 소품을 활용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직접 던져주기도 한다. 살인 도구를 살펴보던 S는 그것을 찍은 사진이 현대미술처럼 보인다며 무대에 설치된 모니터로 사진을 공유한다.
S는 '살해 도구를 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듣기 거북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떨쳐버리고 싶지만 쉽게 틀렸다고 말할 순 없는 논리를 갖춘 주장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예술의 본질에 관한 흥미로운 의문을 만들어낸다.
다만 살해 도구와 아버지가 살해된 현장 등 자극적인 광경을 사진으로 직접 제시하는 연출은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불편한 장면은 "보기 싫은 관객은 눈을 감고 있어도 좋다"는 대사를 통해 사전에 공지된다.
마르틴과 대화하며 정보를 얻어낸 S는 자신이 고용한 배우 페데리코와 함께 연극을 완성해나간다. 페데리코는 마르틴의 버릇과 성격을 따라 하는 데서 출발해 자신만의 해석을 더한 새로운 인물을 선보인다.
작품은 마르틴과 페데리코를 1인 2역으로 설정해 극이 진행될수록 서로의 모습을 구별할 수 없게 연출했다. 초반부에는 농구를 좋아하는 마르틴과 농구를 해본 적 없는 페데리코가 명확히 구분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구분은 흐려진다.
종국에는 누가 배우인지, 관객이 보는 장면은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파악할 수 없는 장면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옥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마르틴일까, 페데리코일까. 작별 인사를 건네는 S는 어떤 답도 내놓지 않은 채 관객에게 풀리지 않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S를 연기한 이석준은 마르틴의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는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여준다. 그는 마르틴이 착용한 묵주, 농구 용어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마르틴의 글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배우가 수십 개의 농구 용어를 하나도 빠짐없이 암송하는 장면에서는 객석까지 그 열정이 전해진다. 제자리에 서서 외워둔 글을 읽어 내려가는 모습은 한 편의 곡예를 보는 듯 아찔해 숨을 죽이게 된다.
우루과이 극작가 세르히오 블랑코의 2013년 작품으로, 56회 백상예술대상 연극상을 받은 주목받는 연출가 신유청이 참여했다. S는 이석준과 함께 정희태, 길은성이 연기하며 마르틴 역은 이주승, 손우현, 정택운이 맡는다.
연극은 9월 24일까지 계속된다. 17세 이상 관람가.
cj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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