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다석이 풀어낸 늙은이(老子)

김종길· 기자 2023. 7. 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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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하나’로 온통을 꿰뚫어 커극겆(太極)의 ‘없자리’에 오른 한글철학자 다석 유영모의 알맞이(哲學)를 배워 익힌 배우미(學者)들의 책이 늘고 있다. 이번에는 유영모의 노자(老子) ‘‘늙은이’’를 여러 갈래의 사상으로 엮어서 푼 <다석 유영모의 늙은이 풀이>(도서출판 기역)가 나왔다.

풀이를 한 이는 정읍교회, 대전주교좌교회, 청주수동교회의 관할사제 일을 맡다가 2015년에 전북 고창 ‘반암산골’로 내려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윤정현 신부다. 그는 2003년 7월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절대자에 대한 다석 유영모의 이해’로 박사학위 받았다. 다석사상으로 해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는 그가 처음일 터.

오래전에 다석의 제자 박영호가 ‘늙은이’를 <에세이 노자-빛으로 쓴 얼의 노래>, <노자와 다석>으로 펴낸 바 있다. 다석과 노자를 한데로 엮어낸 글은 마음을 뒤흔들어 깨운다. 하지만 다석이 우리 토박이말로 바꾼 ‘늙은이’는 씨알 가르칠 바른 소리(訓民正音) 꼴로 쓴 ‘뜻글’이어서 읽고 풀기가 쉽지 않다. 박영호도 ‘다석어록’에 기대고 여러 철학자의 말씀을 엮어서 풀었으나 토박이말은 다 풀리지 않았다.

윤정현 신부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고창군립도서관 인문독서동아리 ‘고창옛글읽기’ 회원들과 84주에 걸쳐서 다석의 ‘늙은이’를 다 읽고 풀었다.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강연만 한 것이 아니라, 회원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읽고 풀고, 또 말을 벌이는 토론을 펼쳤다. 말 벌림이 깊으니 더 크게 다가설 수 있었으리라. 윤 신부는 이때 오간 말들로 풀이에 깊이를 더했다.

그는 성공회 사제답게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로 불리는 ‘거룩한 독서’의 방식으로 ‘늙은이’를 읽고 또 읽었다. 몸․맘․얼 닦아감의 읽기라고 할까. 거룩한 독서는 첫째, 거룩한 글귀를 읽고, 둘째, 읽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셋째, 묵상 가운데 떠오르는 것을 하느님께 계속 질문하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인도 아래 은총을 맛보는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온통 묵상과 기도로 이뤄진 듯 짧고 간명하게 다석의 ‘늙은이’를 훑어 나간다. 가온꼭지(核心)의 말들을 찾아서 가져와 뜻을 밝히고, 새로운 글월(文章)을 만들어 냄으로써 읽은 이들이 보다 좀 더 쉽게 다석의 ‘늙은이’에 다가서도록 이끄는 것이다. 마치 그의 <늙은이 풀이>는 그루터기처럼 잠깐이나마 앉아서 생각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는 작은 사원 같기도 하다.

그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갈라 2:20) 있는 신비체험을 한 것처럼 “내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내 안에” 있는 듯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늙은이 풀이>는 그런 거룩한 삶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 게 아닐까 싶다.

늙은이 76월(章)을 풀면서 글월 첫머리에 그는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얼이 살아 있고 정신이 깨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지 눈을 뜨고 움직인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하늘의 가르침에는 관심 없고 교회를 크게 확장하고 교세를 키우는 교회 성장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성장하지만 이미 죽은 무리이다.”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는 노자(老子) 늙은이를 꿍꿍하면서 종교는 물론, 이 사회가 올바르게 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했다. 기독교에만 갇히지 않고 더 넓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참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밝히려 힘쓴 것이다. 마지막 글월을 풀면서 “예수, 석가, 노자의 글에는 역설적인 표현이 많다. 그리고 그들의 말씀은 아름다운 말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지혜가 번뜩이는 말이다.”라고 쓴 까닭이 거기 있다.

그의 호는 소다석(小多夕)이다. 다석이 갔던 길 따르겠다는 자신의 결심이리라. 198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90년 7월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 간사로 일했으며, 그해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사건에 관여하기도 했던 그의 뒷하늘(後天) 여는 지금의 삶은 ‘작은 다석’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늙은이 풀이>는 그래서 그의 삶이 녹아있는 ‘소다석 일지’로도 읽힌다.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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