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외무장관, 몰려드는 취재진에 ‘인기스타’ 등극… “이래도 왕따냐”
취재진 질문 세례… 사진 촬영 요청도
박진 “한국 기업과 교민 보호” 당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전쟁을 끝내고 휴전할 생각은 없는가?” “우리에게 단 한 마디라도 해줄 수는 없나?”
13일(현지 시각)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외교장관회의가 열리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내의 샹그릴라호텔 로비에 세르게이 라브로프(73) 러시아 외무장관이 들어섰다. 그러자 취재진 수십여명이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인 그를 에워싸며 일대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쏟아지는 질문에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바닥에 앉아있던 기자들을 바라보며 일어나라고 손짓하더니 여유있는 표정으로 셀피(selfie) 등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는 수행원들과 유유히 사라졌다. 이런 모습은 회의 중 몇 차례 더 반복됐는데 일부 외국 방송 기자들은 이 장면을 배경으로 뉴스를 전하기도 했다.
이번주 인도네시아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 관련 다자(多者) 회의에서 라브로프 장관이 최고의 ‘인기 스타’로 등극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가 국제 외교무대에서 사실상 고립된 상황에서 최고위급 외교관의 입장과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20년 ‘러시아 연방 영웅’ 칭호를 부여한 라브로프는 장관만 19년째 역임 중인 직업이 장관인 인물이다. 러시아 외교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라브로프 장관이 회의장에 등장할 때마다 언론은 그의 동작 하나 하나에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했다.
라브로프 장관의 이같은 ‘인기(?)’에 가장 반색한 건 러시아 당국이었다. 러시아 외교부는 이날 트위터에 라브로프 장관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올리며 ‘오늘의 사진(Photo of the Day)’라고 명명했다. 그러면서 “이게 서방 언론이 날마다 꿈꾸던 고립(isolation)이라면 진정한 왕따는 서방 본인들 아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RT, 스푸트니크 통신 등 러시아 관영 언론들에서도 “장관이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는 보도들이 이어졌다. 자국민을 상대로 일종의 선전 효과를 노린 것으로도 풀이된다.
유엔(UN) 등 국제사회에서 매번 규탄을 넘어 냉대를 당하는 러시아가 이번과 같이 정상적으로 다자 외교를 할 수 있는 건 ‘아무리 민감하고 심각한 문제라도 대화로 풀자’는 아세안 특유의 외교 문법이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왕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 수브라마냠 자이샹카르 인도 외교부 장관, 레트노 마르수디 인도네시아 외교부 장관 등과 연쇄 회담을 가졌다. 특히 카오 킴 호른 아세안 사무총장과 만나서는 그의 얼굴이 새겨진 마트료시카 인형(인형 안에 인형이 계속해서 포개지는 러시아 목각인형)을 선물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선물을 할 때마다 인형의 크기가 조금씩 더 커지는 ‘전통’이 러시아와 아세안 사이에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박진 외교부 장관도 13일 인도네시아 외교부 장관 주최 만찬에서 라브로프 장관과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러관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과 교민들의 정당한 권익은 보호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 장관은 우리 정부가 내년부터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하는 유엔 안보리에서도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으로 건설적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이에 대해 라브로프 장관은 “잘 알겠으며 외교 채널을 통해 소통해 나가자”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소식통은 “지난해 7월 발리에서 열린 G20(주요 20국) 외교장관회의 때도 리셉션에서 홀로 있는 라브로프에게 박 장관이 다가가 적극 대화를 걸었다”며 “양국이 국제사회에서 서 있는 위치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chemistry)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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