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해야 할 음악은 서울 바깥에도 있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studiocarrot@naver.com)]
얼마 전 광주음악창작소에 다녀왔다. 심사나 강연하러 가끔 광주음악창작소를 방문한다. 광주음악창작소가 있는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사직동이다. 광주음악창작소가 아니었다면 나의 인식 속에는 부산의 사직동밖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전당역에서 내려 광주음악창작소로 걸어 올라가는 길옆에 라이브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그곳이 한때 광주에서 포크 음악이 번성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장소라는 걸 알게 된 건 조금 뒤였다. 만약 내가 그 길을 가보지 않았다면 사직동이란 지명뿐 아니라 광주의 포크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유준과 장상은이 함께 쓴 <모모는 철부지>는 근래 읽은 음악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모는 철부지>란 제목에서 김만준의 노래 '모모'를 연상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모모'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히트곡이었고, 책 제목 그대로 <모모는 철부지>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그리고 노래의 배경과 함께 '모모'는 1980년 전후의 광주와 연결된다.
<모모는 철부지>엔 '전일방송 대학가요제의 기억'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전일'은 광주·전남의 지역신문인 <전남일보>의 줄임말이다. 전일방송은 1971년 개국한 뒤 MBC 대학가요제가 열린 이듬해 1978년 제1회 전일방송 대학가요제를 개최한다. 전일방송 대학가요제를 통해 광주·전남 지역 청년 음악인들의 노래가 알려질 수 있게 됐다. <모모는 철부지> 글쓴이들은 전일방송 대학가요제를 중심에 두고 1980년 전후 광주·전남 지역의 음악 씬(scene)을 다룬다. 그들은 당대 청년들의 음악을 DIY(Do It Yourself) 음악이라 표현했다.
1978년, 문화방송 대학가요제도, 동양방송 해변가요제도 아닌 전일방송 대학가요제가 광주에서 열렸다. 많은 광주·전남 지역 청년이 DIY 음악을 들고 참가했다. 대상은 김만준의 '모모', 전국구 히트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곡의 우수성도 있겠지만, 방송의 영향도 커서 당시 전일방송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마다 이 노래를 틀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모'의 인기는 전라도를 넘어 서울까지 올라갔고 김만준은 짧게나마 당대 최고 인기 가수 자리에 오른다. 2회, 3회 대상곡인 김종률의 '소나기', 하성관의 '빙빙빙'도 같은 방식으로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다.
<모모는 철부지>는 전일방송 대학가요제를 중심으로 내내 '로컬'이라는 화두에 집중한다. 전일방송 가요제에서 수상한 이들은 계속 광주에서 활동하며 이후의 민중음악과도 연결된다. '소나기'로 대상을 받은 뒤에 MBC 대학가요제까지 나가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받는 김종률은 서울보다 광주 활동에 주력했고, 광주의 비극을 목격한 뒤엔 '검은 리본 달았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다.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노래극을 실제로 처음 '연행'한 것도 광주·전남의 예술인들이었다.
이처럼 독자적인 씬을 갖고 있던 광주는 1980년대 접어들며 세를 잃는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전일방송이 KBS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광주 청년들의 노래는 전국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점점 더 서울로 모든 게 집중된다. 지금 사직동에 남아 있는 라이브 카페 거리는 그나마 그때 움튼 문화가 자리한 결과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김종률, '바위섬'을 부른 김원중, '직녀에게'를 만든 박문옥 등이 광주의 포크·민중음악 씬을 일구었다.
<모모는 철부지>가 다루는 기간은 1980년 전후로 고작 3년 정도다. 하지만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노래들이 탄생했는지, 시대와 함께 광주·전남의 음악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한다. 1978, 1979, 1980, 3년 동안의 광주를 이야기하는 데만 책 한 권이 필요했다. 만약 이를 더 확대해 광주 안의 대중음악 전체를 다룬다면 써야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모든 시간마다, 모든 장소마다 음악은 쉼 없이 탄생했고, 음악인의 역사가 쌓여갔다. 그저 조금 덜 알려졌을 뿐이다.
<한국 팝의 고고학>을 쓰고 나서 아쉬웠던 건, 그리고 실제로 받았던 비판 가운데 하나는 책이 너무 서울 중심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1980년대 편은 아예 서울의 장소들을 주제로 해 원고를 풀었고, 1990년 편도 압구정동에서 시작해 홍대 앞으로 끝을 맺었다. 물론 서울 안의 음악이 가장 큰 건 당연하고, 음악 하는 이들 또한 서울에 몰려있다. 그렇다고 각 지역에 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자적인 세력을 갖출 때도 있었고, 서울에선 만들어질 수 없는 씬이 만들어질 때도 있었다. 그 '로컬'에 더 많은 기록이, 조명이 필요하다.
가령 나는 부산 사람이 아니지만, 1980년대 중반의 부산 대학가로 들어가 보고 싶은 이룰 수 없는 몽상을 갖고 있다.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나는 이때의 부산 음악 씬이 너무나 궁금하다. 여운의 '홀로된 사랑', 도시의 그림자의 '이 어둠의 이 슬픔', 어우러기의 '밤에 피는 장미', 바다새의 '바다새' 등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MBC 강변가요제를 통해 알려졌다. 대부분이 동아대학교, 동의대학교, 부산산업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것도 눈에 띤다. 1987년 8월 3일 자 <부산일보>에선 "釜山 출신들 歌謠界 정상 잇따라 노크"란 제목의 기사로 이 같은 현상을 짚기도 했다.
왜 대학가요제가 아닌 강변가요제에 참여했던 건지(여름에 열리던 강변가요제와 부산 바다의 낭만이 맞닿아있던 건지), 왜 거의 혼성 중창 팀이었는지, 학교 동아리 회원들끼리 교류가 있었는지, 서울과는 분위기가 어떻게 달랐는지, 당시 부산에서 음악을 잘한다고 소문난 음악인은 누가 있었는지,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겨우 3년 남짓한 시간이지만 <모모는 철부지>처럼 책 한 권을 만들기엔 충분하다. 언젠가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부산 출신 혹은 지금 부산에 살고 있는 이가 쓴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대전 출신인 나는 대전의 음악 씬을 무시해왔고, 또 그만큼 무지했지만, 유성 관광특구의 영향으로 밤 문화, 곧 나이트클럽 씬이 굉장히 발달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비록 대중음악사의 정사로 기록되지는 못하겠지만 이를 기록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좋을 것'이고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썼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쉽지 않다. 작업을 위해선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야 하고, 자료를 찾아야 하고, 이 모두를 계속 정리해야 한다. 한 개인의 열정만으론 분명 한계가 있다.
지금 인천에 살고 있는 나는 1980년대부터 인천의 대중음악, 특히 록 음악 씬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때 인천은 록과 헤비메탈의 도시였다. 그 바위와 중금속의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들을 찾아 만나러 다녀야 한다. 이는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모모는 철부지>도 관(官)의 도움을 받아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역문화'라는 건 일견 거창해 보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해나가면 된다. 그 지역의 문화를 제대로 기록하는 일이다. 서울의 주류 음악 말고도 우리에겐 기록하고 얘기할 만한 음악이 너무나 많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studiocar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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