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손기정-남승룡-서윤복, 함께 만든 '해방된 조국의 첫 승리'…'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조명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손기정과 남승룡은 평생을 함께 한 동료였다.
1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총성과 함성 - 사라진 금메달리스트'라는 부제로 손기정과 남승룡의 그날을 조명했다.
1932년 4월, 일본 도쿄의 한 여관 앞에서 여덟 명의 조선 청년들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이들은 바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선수들. 그들은 일본 최대 달리기 대회에 유일한 조선 팀으로 참가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신예 손기정과 선임 에이스 남승룡이 있었다. 신예와 선임이지만 이들은 동갑내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육상 대회에서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라이벌로 경쟁을 펼쳤고, 베를린 올림픽 출전권을 놓고 다시 다투었다.
이들은 일본 대표팀 선발전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했고 이에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런데 일본인 코치는 선발전에서 4위를 한 일본인 선수 대신 둘 중 한 사람이 빠지라고 했고, 남승룡과 손기정은 서로가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1, 2위를 다 뺄 수는 없는 상황에서 코치는 최종 선발전을 다시 진행하겠다고 했고, 이에 올림픽 사상 전무후무한 현지 선발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손기정과 남승룡은 당당하게 출전권을 지켜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당일, 수많은 이들은 한 사람에 주목했다. 지난 올림픽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의 자바라 선수. 그는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1년 전부터 올림픽을 준비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선수들은 일본식 버선에 고무바닥을 댄 지카다비 하나로 버티며 스스로 컨디션 관리를 하며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경기 전 늘 고구마와 인절미로 영양 보충을 하던 남승룡은 곤란해했다.
그럼에도 경기는 시작됐고, 자바라 선수는 압도적인 속도로 빠르게 치고 나갔다. 하지만 그는 오버페이스로 쓰러지며 실격 처리됐고, 그 뒤를 따르던 손기정이 선두를 차지했다.
손기정 선수는 끝까지 전력을 다 했고 그는 마지막 100미터는 12초에 주파하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이자 동양인 최초 우승이었다.
그리고 인절미와 고구마를 대신해 주먹밥을 먹은 남승룡 선수는 탈이 났다. 그럼에도 그는 후반의 사나이답게 조금씩 선두권과 거리를 좁혔고, 2위 하퍼와 단 19초 차이가 가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경기가 끝나고 미국의 존 켈리 선수는 손기정 선수의 운동화를 탐냈다. 그의 우승 비결이 운동화라고 생각했던 것. 이에 손기정 선수는 선뜻 존 켈리에게 건넸고, 이는 후에 엄청난 이변을 만들어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우리 선수들의 국가는 일본으로 소개됐다. 그리고 시상대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게양되었다. 이에 손기정 선수는 나라 없는 설움을 절실히 느꼈다며 당시 일장기가 게양되는지도 몰랐었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시상대에 오른 우리 선수들은 가슴에 달린 일장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남승룡 선수는 손기정 선수를 부러워했다. 금메달을 획득해 월계수 다발을 받은 손기정 선수는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기에 그것이 부러웠던 것. 그는 바지를 최대한 올려 일장기를 가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후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한국인이라고 끊임없이 어필했다. 스스로 망명할 각오까지 하며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 알리고 싶었던 것.
올림픽이 끝나고 귀국한 두 사람, 올림픽 영웅으로 환영을 받아 마땅하나 일본 측은 환영 인파도 막고 두 사람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이에 손기정 선수는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며 본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을 했다.
그렇게 조선에서 사라진 마라토너 손기정은 이후 은행에 취직했다. 그랬던 그는 돌연 1945년 사표를 제출했다. 해방을 맞으며 계획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조선 팔도를 뒤지며 제2의 손기정을 찾았고, 24살의 대학생 서윤복을 비롯해 마라톤 유망주 10인을 발굴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합숙소로 운영하며 선수 양성에 힘썼고, 그의 곁에는 여전히 남승룡이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기정은 자신의 운동화를 가져갔던 존 켈리의 연락을 받았다. 존 켈리는 손기정의 운동화 덕분에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1위를 했다고 알렸던 것. 이에 손기정은 올림픽을 제외한 마라톤 국제대회가 또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곧바로 보스턴 마라톤대회 출전을 준비했다.
어렵게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미국으로 날아간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보스턴에 무사하 도착해 대회 코스를 확인했다. 영어를 전혀 할 수 없던 이들은 교민들에게 인간 이정표 역할을 부탁했고, 교민들은 한 마음으로 이들을 돕기로 했다.
경기 전날 고민에 빠진 서윤복은 남승룡에게 페이스 메이커를 부탁했다. 36살의 노장이었던 남승룡은 "네가 기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함께 뛰어주겠다"라며 함께 태극기를 달고 뛰기로 약속했다.
20만 명이 넘는 관중들 앞에서 10위권 내에 들어 해방된 조국을 알리는 것이 목표였던 이들은 자신들의 페이스대로 달렸다. 그러나 결승점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보스턴 대학생들이 응원차 선수들에게 뽀뽀를 해주는 키스존을 지난 서윤복. 28킬로 지점을 지나자 그에게는 손기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기정 감독은 "야 이 녀석아 좋은 위치에 섰다. 그대로 끌고 가면 돼"라며 제자를 응원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달리는 거야. 그러니까 힘껏 달려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조국이 없었던 손기정의 마음을 헤아린 서윤복은 더욱 힘을 내어 달렸다. 갑자기 코스에 뛰어든 개 한 마리의 습격에 부상까지 당했지만 그는 2킬로미터의 오르막길에서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2시간 25분 39초, 자신의 최고 기록을 14분 단축한 어떤 말로도 설명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서윤복의 페이스 메이커로 뛴 남승룡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무려 12위를 기록했다.
세 사람이 함께 만든 해방된 조국의 첫 승리에 엄청난 인파들이 이들을 환영했다. 이는 올림픽 금메달 100개와도 비교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 발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글귀를 서윤복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40년 뒤, 77세의 백발이 된 손기정은 부상을 당한 발목을 끌고 88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섰다.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였던 그는 "남의 나라 국기로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내가 50여 년 후 우리 서울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것은 베를린의 금메달 그 이상의 감동이었다"라고 소감을 밝혀 보는 이들까지 울컥하게 만들었다.
한평생 지도자로 살았던 남승룡 선수는 비운의 2인자, 대접받지 못한 3등이라는 아쉬운 수식어를 늘 달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분명 잊히면 안 될 존재였고, 그의 인생에 대해 들은 조정식 아나운서는 "마라톤의 지휘자"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붙여 눈길을 끌었다.
2001년 타계한 남승룡 선수, 이듬해 손기정 선수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서로 격의 없었던 관계였던 이들은 혼자 살 수 없는 인생에서 늘 함께 달리는 파트너였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손기정 선수의 말을 전했다.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