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를 전담하고요, 고양이를 사랑합니다” [책&생각]

한겨레 2023. 7. 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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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번역가를 찾아서]문학·인문 깊이 읽고자 택한 번역
유명 프랑스 작품 70여권 옮겨 와
잘할 수 있는, 도전하고 싶은 책만…
최근엔 경제학자 피케티에 도전
번역가를 찾아서 │ 전미연 번역가
서울 광화문 작업실에서 만난 전미연 번역가.

<개미>의 한국어판 출간 30주년 및 신간 <꿀벌의 예언> 출간을 기념해 최근 한국을 방문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는 무려 10일간 한국의 팬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서울, 원주, 부산 등에서 북토크 등을 가지고 제주도에서는 팬들과 ‘플로깅’을 하기도 했다. 그의 책이 가장 많이 팔린 나라에 대한 특별한 애정 표현이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프랑스 작가’라는 수식어를 가능하게 한 데는 번역의 공이 컸다. 이는 베르베르도 인정하는 바. 보통 번역료는 한번에 금액을 지불하는 ‘매절 계약’을 하지만, 베르베르 작품 번역은 팔리는 만큼 지불되는 인세 계약을 한다. “내 책이 한국에서 많이 팔리는 것은 번역 덕분”이라며 베르베르가 출판사에 특별히 부탁한 탓이다.

지난해 <행성>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에 이어 올해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 <꿀벌의 예언>까지 숨 가쁘게 내놓은 뒤 한숨 돌리고 있는 전미연(53) 번역가를 지난달 21일 만났다. 2016년부터 베르베르 작품을 전담하고 있는 그는 “베르베르의 자전적 에세이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제일 많이 떠올린 단어는 수렴(convergence)이었다”며 “베르베르의 인생은 오롯이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중심으로 펼쳐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르베르의 삶이 ‘글쓰기’로 수렴된다면, 전씨의 삶은 오직 ‘번역’으로 수렴된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세계화’ ‘국제화’ 기조에 발맞춰 대부분 학생들의 관심은 통역에 쏠렸지만, 그는 번역에 눈길이 갔다. 순발력과 서비스 정신을 바탕으로 법률, 경제, 경영 등 실용을 다루는 통역보다는 문학이나 인문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읽어내는 번역이 좋았다.

대학원 졸업 논문으로 에마뉘엘 카레르의 소설 <겨울 아이>를 번역했고, 그것이 출판사 열린책들 홍지웅 사장의 손에 들어갔다. 열린책들은 이미 다른 번역가의 손을 거쳐 <겨울 아이> 번역을 마친 상태였다. 홍 사장은 그 번역본을 포기하고, 전씨에게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번역가로 데뷔한 그는 지난 25년간 베르베르, 아멜리 노통브, 기욤 뮈소 등 유명 프랑스 작품 70여권을 번역했다. 그 사이 학업과 교직도 병행했다.

프랑스 대사관에 선발돼 파리 3대학 통번역대학원에서 번역 과정을 수료하고, 캐나다 오타와 통번역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외대 통번역대학원으로 돌아와 10년간 제자들을 키워내다가 2년 전 그만뒀다. “앞으로 현역 번역가로 활동할 시간이 10년 정도 남은 거 같은데, 수업을 하면서 번역을 하자니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번역에 몰두하기 위한 삶은 아주 단조롭고 규칙적이다. 아침 10시에 서울 광화문에 있는 오피스텔로 출근한다. 그때부터 오후 5시까지 쉬지 않고 번역한다. 점심 약속도 거의 잡지 않고 점심 식사도 간소하게 한다. 2개 벽면이 통창으로 도심을 훤히 내려다보는 시원한 뷰를 가진 오피스텔을 고른 이유도 종일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피스텔은 컴퓨터와 책상, 소파 등만 갖춘 단출한 공간이다. 행여 다른 책을 읽는 데 시간을 쓸까봐 번역서 외에 다른 책은 두질 않는다.

퇴근한 뒤에는 2시간 동안 체부동과 통의동 골목에 있는 길고양이 30여마리를 챙긴다. 그가 중성화 수술을 다 시켜준 아이들이다. 이들의 먹이도 챙겨주고 건강도 체크한다. 이때가 그가 하루 중 가장 말을 많이 하고 많이 웃는 때다. “고양이와의 교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귀가한 뒤에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강아지 7마리를 챙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10년 전 사무실 근처 골목에서 쓰러져 죽어가던 한 고양이를 무작정 안고 동물병원으로 달려가면서부터 “직업은 번역가요, 정체성은 ‘캣맘’”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챗지피티까지 등장해 번역가라는 직업을 위협하고 있다. “후배 세대가 예전만큼 두텁지 않아 아쉽지만, 저는 직업적으로 굉장히 행복했어요.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 스타일인데 번역은 혼자 할 수 있는 직업인데다 지적인 만족감도 크죠. 게다가 인간은 ‘책’이라는 매개가 없이는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방법이 없잖아요.”

그는 번역 기준이 분명해서 거절하는 책이 많다. “잘할 수 있는 책과 도전하고 싶은 책만 한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은 프랑스의 경제 석학 토마 피케티의 책이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영어본을 번역한 것이었다. 프랑스어 번역가로서 아쉬워서 이번에 나서게 됐다. 단어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섬세한 문학 번역가로 유명하지만, 실은 통번역대학원에서 경제 번역을 오래 가르쳤다. 그의 숨은 저력이 빛날 때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서울 광화문 작업실에서 만난 전미연 번역가.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두려움과 떨림

벨기에 출신 작가가 일본 대기업에서 겪은 자전적 체험의 소설이다. 엄격한 명령 체계와 비효율적인 절차 등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전 번역가는 “이질적인 것을 대하는 공동체의 태도에 대해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이면서 지금 봐도 재미있고 노통브스러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아멜리 노통브 지음, 열린책들(2014)

나 아닌 다른 삶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비극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 그 속에서 더욱 빛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 번역가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지금 살아 있는 작가의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나 스스로가 번역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열린책들(2011)

꿀벌의 예언

꿀벌이 사라지고 인류 멸종의 위기가 닥친 30년 뒤의 지구를 목격한 주인공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전 번역가는 “베르베르의 <제3인류> 이후 가장 스케일이 큰 작품으로 역사, 종교, 과학, 생태 등의 요소들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고 일단 재미있다”고 추천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열린책들(2023)

22세기 세계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문가들이 100년 뒤인 22세기 세계를 낙관적으로 상상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몽상적 이상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이상향을 그린 것이 특징이다. 전 번역가에게 “후배,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번역해서 더욱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알렉시 제니 등 지음, 황소걸음(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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