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은 내 마음속 새가 되어 [책&생각]

한겨레 2023. 7. 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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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잡히지도, 여간해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말이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 잡아 이전엔 없던 기분을 만들어낸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어떤 말은 그것을 꺼낸 사람이 짐작했던 크기 이상의 파장을, 그 말을 건네받은 사람의 내면에 일으킨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함부로 꺼내진 말들은, 그것을 '들어버린' 이들에 의해 내내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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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의 시동걸기]

2020년 8월 <한겨레21>과 인터뷰할 당시의 황인찬 시인.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지음 l 문학동네(2023)

손에 잡히지도, 여간해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말이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 잡아 이전엔 없던 기분을 만들어낸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씨앗이 날아가 상대방의 마음에 심겨 그 자리에 예상치도 못한 작물이 무성해지는 것과 같다. 어떤 말은 그것을 꺼낸 사람이 짐작했던 크기 이상의 파장을, 그 말을 건네받은 사람의 내면에 일으킨다. 세상에는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제 마음대로 꺼내 든 말로 힘을 부리는 상황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말을 ‘들은/건네받은’ 사람에 의해 그 말의 처음 의도를 넘어서는 힘이 길러지는 상황도 있다. 말을 듣는 편이 마냥 수동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혹은 같은 이유로 말을 꺼낼 때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을 전해 듣는 이를 우습게 여기지 말 것, 함부로 말하지 말 것. 말을 듣는 이가 그것을 어떻게 가꾸는지에 따라 그 말에 담긴 힘이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번 생겨난 말은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권력을 영위하는 일에 급급한 정치세력이 부지기수로 꺼내 드는 기만적인 말과 마주칠 때마다 그 말을 듣는 우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잊지 말자고 생각한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함부로 꺼내진 말들은, 그것을 ‘들어버린’ 이들에 의해 내내 잊히지 않을 것이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말이 어떻게 끝까지 남아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지를, 문턱을 넘어 집으로 들어온 ‘새’의 이미지로 표현한 시를 읽는다.

“여름빛과 함께/ 새 한 마리가 집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새가 들어와 무섭다며 야단이고/ 새는 온 집안을 종종거린다/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그러나 새가 무엇인가를 찾는 일은 없다/ 그저 여기저기 들쑤실 뿐/ 그때마다 그는 소리를 질렀고// 창문은 모두 닫혀 있는데 어디로 들어왔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온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가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며// 그러나 새는 떠나지 않았고/ 그가 울기 직전의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후로 새는 여기서 오래 살았다//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자꾸 집안을 들쑤시면서// 그가 떠나고/ 활짝 열린 창을 보면서도// 새는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그 해 구하기’ 전문)

집에 들어온 “새 한 마리”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불편을 야기하는 존재 같기도 하고, “그”와 “나”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존재 같기도 하다. “그”는 그런 “새가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면서 창문을 “활짝” 열지만, 새는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화자의 움직임이다. 화자인 ‘나’는 “그”처럼 ‘새’를 집밖으로 보내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어쩌면 화자는 집 안에 들어온 새가 내내 집에 머무르리란 걸 일찍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쯤이면 “새”는 어떤 관계에서든 그 구성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불화와 슬픔의 씨앗에 대한 비유로 읽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무슨 말을 ‘들은/건네받은’ 이의 내면에서 빚어지는 움직임의 자취에 대한 비유로도 읽힌다. “여기서 오래 살”고 있는 새를 어떻게 보살필까. 이것을 고민하는 이로부터 이전과는 다른 이후가 구해진다. 이를 아는 시는 일부러 이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새를 들인 사람이 가진 힘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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