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책 읽으면 건강에 악영향? 세상이 달라졌지 [책&생각]

양선아 2023. 7. 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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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여성 관련 텍스트 톺아봐
구시대적 젠더 규범 살피고
여성 독서 둘러싼 ‘풍광’ 조망
19세기 중반에 프랑수아 봉뱅은 <엘링가 이후, 책 읽는 여성>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피터 얀센 엘링가의 <화가, 책 읽는 여성, 청소하는 하녀가 있는 실내>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집안일을 제쳐두고 책을 읽고 있는 여성을 주목한 작품이다. 책과함께 제공

위험한 책읽기
‘문학소녀’에서 페미니스트까지, 한국 여성 독서문화사
허윤 지음 l 책과함께 l 2만2000원

“책을 읽을 때 생기는 신체 활동 부족은 상상력과 감정이 억지로 뒤바뀌는 것과 결부되어 근육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래가 들끓고, 가스가 차고, 변비가 생기도록 만들 것이며, 잘 알려진 것처럼 특히 여자의 경우 생식기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싶지만, 1791년 교육이론가 카를 바우어에겐 여성의 독서는 이처럼 위험한 것이었다. 18세기만 해도 서구에서도 책읽기는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가정과 양육의 책임자여야 할 여성이 책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일로 치부됐다. 그러나 거대한 여성해방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읽고 쓰고 말하면서 ‘허스토리’(herstory)를 써내려갔다. 읽는 행위는 그만큼 정치적 행위였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여성들의 책읽기는 어땠을까. <위험한 책읽기>는 한국 최초 근대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문을 연 190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여성들이 어떤 텍스트를 읽고 어떻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진화해왔는지 톺아본 책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문학과 문화를 동아시아 젠더적 관점으로 연구해온 저자 허윤 국립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여성에게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던 젠더 규범이 여성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해체되고 “내가 김지영이다”라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독자군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지는지 살핀다. 각 시대별 여성 독서를 둘러싼 풍경을 넓게 조망한 이 책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독서 계보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에 소개된 다양한 소설, 잡지, 만화 등의 텍스트에는 기존 질서가 여성에게 강조하던 규범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또 현실에서 억압되고 주변화됐던 여성의 욕망과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투영됐는지 설명한다. 그 변천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여성의 억압 구조가 무엇이고 현 시대 여성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다.

식민지 시대, 근대 여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낭만적 사랑과 자유 연애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순결과 정조를 지켜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다양한 작품들에서 정조를 지키지 못한 여성들은 죽거나 절망에 빠지는 식으로 그려졌다.

해방 이후엔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독본, 개론서 등 다양한 교육용 책이 등장하는데, 이 중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었다. 저자는 대표적인 독본으로 <가정독본>과 <조선여성독본>을 꼽고 이 둘을 대조한다. 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한 민족지도자 이만규는 <가정독본>에서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지키는 민주적인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며 “며느리도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언뜻 보면 진보적인 주장 같지만, 저자는 이만규가 근대성을 강조하면서도 여성을 여전히 가정 내 존재로만 규정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짚는다. 반면 사회주의자였던 최화성이 쓴 <조선여성독본>은 조선해방과 여성해방을 등치시키며 여성해방운동사의 관점으로 독본을 써내려갔다는 점에서 주목한다. 최화성은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규정한 조선의 유교 문화로 인해 여성은 인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식을 낳기 위한 도구이자 살림하는 종복일 뿐”이라고 진단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해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를 중심으로 독본을 구성했다.

1950년대는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대폭 늘면서 독서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박정희 체제 하에서는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오면 안 된다”거나 “반지나 귀고리 등 사치 풍조를 보여서는 안 된다”처럼 영화나 만화에서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조차 검열한다. 1965년 창간된 잡지 <여학생>에서는 급기야 백인 소녀가 사춘기 시절 흑인 남자에게 강간당한 뒤 대학 졸업 후 결혼한 백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흑인 아이가 태어났다는 ‘괴담’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여성의 성과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려고 한다.

책은 이처럼 다양한 텍스트에 등장한 구시대적인 젠더 규범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주체’로서 여성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도 추적한다. 저자는 여성들이 즐겨 읽었던 잡지나 만화, 로맨스 소설 등에 나타난 여성 서사를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특히 욕망을 가진 ‘주체’로서의 여성에 주목한다.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여성 잡지 <주부 생활>에는 가정 내 규범으로부터 일탈하는 ‘로맨스 소설’이 등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로맨스 소설의 인기가 “가족들과 단절되어 즐길 수 있는 매우 개인적인 행위로서의 독서”라고 해석한다. 또 <여학생> 잡지의 ‘불량소녀’라는 코너에서, 여성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가족을 고발하고 기성 세대나 사회를 비판했다고 전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최희숙, 박계형 같은 ‘여대생 작가’들은 여대생의 연애와 사랑 이야기를 쓰면서 연애와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분위기에 대항했다고 봤다. 이외에도 저자는 1980년대에 등장한 ‘또하나의 문화’나 1990년대에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이끈 여성주의 잡지 <이프>에서 주체로 등장한 여성들을 자세히 살피면서도 그들의 한계까지 촘촘하게 짚는다. 이어 책은 2015년 전후에 등장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스트 독자’라는 새로운 독자가 탄생한 것을 주목하면서, 이들이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사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치성을 획득했고, 읽는 행위가 또 하나의 운동이 됐다고 설명한다.

100년여에 걸쳐 진행돼온 여성 독서사를 쭉 훓고 나면 여성의 자유와 해방에 있어 ‘읽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저절로 깨닫게 된다. “여자가 읽는 것을 배웠을 때, 여자의 문제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라고 오스트리아 소설가 마리 폰 에브너 에센바흐는 말했다. 여성의 문제는 아직 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여성 독자’들이 만들어나갈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궁금해진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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