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서 '두려움' 호소하는 주민들…"경찰 어디 있나요"
경찰 보호 요청했지만 개입 꺼려
(서울=뉴스1) 조현기 기자 = 지난 12일 오후에 찾은 서울 서초 방배아크빌B동은 겹겹이 펜스로 둘러쌓여 있었다. 밖에서 보면 흡사 철거가 진행 중인 건물처럼 보인다. 현장에는 건장한 사설용역업체 직원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1층 곳곳엔 부서진 건자재가 널브러져 있고 유리창과 현관은 깨져 있었다. 이곳 주민 50여명은 "매일 두려움에 떨고 있다"며 "경찰은 어디에 있나"라고 도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 사안에 대해 '민사분쟁'이라며 개입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지주 측은 이와 관련해 "위의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르고, 토지주 측은 법원의 집행관 등을 통한 적법한 판결에 따라 철거 및 퇴거행위를 하던 중"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입주민과 건물주는 "토지주 측이 용역업체 직원들을 고용해 주민의 거주를 방해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토지주와 건물주의 10년 가까이 이어진 갈등에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10년째 이어진 법적 분쟁
법원 판결·결정과 <뉴스1> 취재 등을 종합하면 건물주는 현재 토지주의 소유 토지를 점유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토지주는 철거·퇴거판결이 확정돼 그에 따라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건물주는 법원 판결에선 주민이 있는 한 건물을 철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토지주와 건물주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라 양측 갈등은 법적 분쟁을 넘어서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거주하는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주민들은 토지주와 건물주의 갈등과 별개로 시민의 기본적인 주거권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이 기본 책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사건의 시작은 지난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지주는 경매를 통해 521평 중 498평을 낙찰받았고 2013년 건물주를 상대로 건물철거 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9민사부는 2014년 토지주의 손을 들어줬다. 2017년 2심(서울고등법원)과 같은해 최종심(대법원 제2부)에서도 토지주가 모두 승소했다.
이에 따라 토지주는 2020년부터 건물주에게 추가로 퇴거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지난해 6월30일 대법원 제3부는 이 사건에 대해 "건물의 소유자가 건물의 소유를 통해 타인 소유의 토지를 점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토지 소유자로서는 건물의 철거와 대지 부분의 인도를 청구할 수 있을 뿐, 토지 소유자는 건물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퇴거를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런 일련의 판결에도 토지주와 건물주는 서로 법원의 결정을 엇갈리게 해석하고 있다.
토지주 측은 "본 건물에 대하여 철거판결이 확정됐고 더 나아가서 퇴거판결도 모두 확정됐다"면서 "현재 공용부분 다목적실 103호에 대해 대법원에서 건물주에 대한 퇴거판결에 대하여 파기환송됐다. 이는 공용 부분의 다목적실의 103호만에 대한 파기환송된 판결이고, 이미 103호는 철거판결의 대체집행에 철거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건물주 측은 "대법 판결을 비롯해 지금까지 법원 판결의 취지는 토지주가 건물의 거주자에 대한 위치를 정할 자격이 없고, 이 건물을 상대로 용역 등 강제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단 방해배제청구권으로 지료(토지사용료)를 청구하라는 취지"라면서 "집행정지, 점유금지 가처분이 돼있고 이 건물 안에 토지주 관련된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고 해석했다.
주민들은 오랜 법정 분쟁과 갈등으로 불안을 호소한다.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건물주와 전세 계약 관계 등이 체결돼 있어 이곳에서 당장 나갈 수 없다고 한다. 계약이 만료돼도 건물주가 보증금을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눈앞 범죄"…토지주 "허위 사실"
사설용역업체 직원들은 방배아크빌B동 경비실과 401호에 배치돼 지난 1년 동안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물리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주민들은 법원의 판결문에 근거해 경찰에 용역을 물러나게 해달라고 신고했지만, 경찰이 민사분쟁이라는 이유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게 이곳 주민들의 주장이다.
주민 A씨는 "경찰이 눈앞에서 범죄가 일어나지만 외면하고 있다"면서 이곳을 영화 배트맨과 조커에 나오는 '고담시티'에 본인의 거주지를 비유했다. 고담시티는 영화상에서 범죄·사건이 많이 일어나지만 경찰이 시민들을 보호해 주지 않은 곳이다.
실제 빌라 현장을 방문해 보니 마치 전쟁에서 폭격 맞은 건물 같았다. 먼저 입구는 높은 가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주민들은 "지난해 수능 날인 11월17일 용역들이 건물 주요 시설물을 파손한 뒤 이곳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 이후에도 새벽에 난동을 부리거나 주민들과 물리적 충돌이 이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주장했다.
복도에도 불이 꺼져서 계단을 오르내리다 발목을 접질리거나 다치는 경우는 다반사라고 한다. 주민 일부는 이곳에 살기 두렵다며 집을 포기하고 근처 모텔 등 임시거처에서 생활하고 있다.
토지주 측 퇴거 및 철거 집행 대리인측은 뉴스1에 "건물 입주자는 허위 유치권자와 공모해 무단 점거하고 있는 불법 입주자"라면서 "2021년부터 계속 퇴거 집행을 진행하고자 했으나 계속해 위력으로 막고 있는 상태"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특히 "지난해 11월17일의 철거는 법원의 철거판결에 의한 대체집행결정에 따라 철거가 진행된 것"이라며 "법원의 수권결정에 따라 집행관이 아닌 토지주 측이 철거행위를 하는 것은 위법하지 않고, 건물의 기둥 등의 구조체에 대한 철거가 아님으로 구청에 철거신고를 하고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서울시·서초구청 직원도 현장에 나왔고, 별도로 경찰의 지원도 받은 바가 없다"면서 "오히려 건물주 측과 연관 있는 주민들이 처벌돼 벌금을 부과받고 토지주 측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 도대체 무슨 일이?…"법원서 건물 철거"vs"법원서 주거권 보장"
일부 주민들은 사설용역업체 직원들이 건물에 들어와선 안된다는 법원 판결이 있는데도 경찰이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부장판사 전보성)는 앞서 지난해 10월 방해금지가처분 결정문을 통해 토지주에게 사설용역업체 직원을 고용해 건물에 투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주민들이 점유할 권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주거의 평온은 보호돼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또 용역을 고용해 건물을 봉쇄하거나 주민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과 용역이 건물내부를 배회하거나 건물 안에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평온을 방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법조계에서는 토지주가 용역업체 직원들을 고용해 현장에 배치한 것은 법원의 이 같은 판결에 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토지주 측 퇴거 및 철거 집행 대리인 측은 "무단 점거자들은 자신들이 적법한 임차인을 주장하나 허위 유치권자와 임대차계약을 한 것을 임차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법원 판결 및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은 없고, 오히려 토지주 측에서 무고, 소송사기 그리고 서울중앙지방법원 방해금지가처분 결정에 대하여 본안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 "민사니 고소하라"
주민들은 토지주와 건물주의 법적 분쟁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경찰의 대응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주민들은 방해금지가처분 결정문 등을 보여주면서 경찰에 용역들을 물러나게 해달라고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항상 "민사분쟁이다. 고소하라"라는 답변만 남기고 제대로된 조치 없이 물러났다. 실제 주민들이 경찰에 용역을 수차례 고소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불송치됐다.
주민 C씨는 "우리는 건물주·토지주 편도 아니다. 그냥 여기서 평화롭게 살게만 해달라는 것"이라면서 "그냥 법원도 아니고 우리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 결정이지 않냐. 그런데 도대체 경찰은 법원의 결정을 왜 안 따르는 것이냐"고 울먹였다.
토지주 측은 법원이 결정한 방해금지가처분에서 금지한 행위를 행한 바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해당 지역의 관할 경찰서인 방배경찰서는 형사과에 TF(태스크포스)팀을 꾸려 관련 사항에 주의 깊게 대응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방배경찰서 관계자는 뉴스1과 통화에서 "고소·고발 사건이 접수된 건에 대해선 법원의 판단이나 방배아크빌의 여러 가지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송치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현장에서 우발적인 충돌이나 분쟁이 있을 경우엔 112매뉴얼에 기반하고, 현재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방배아크빌의 분쟁 상황을 고려해 현장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해 여러 충돌 과정에서 경찰의 대응 부분과 관련해선 (당시 담당자였던) 과장과 서장이 (입주민들로부터) 고소당해 다른 경찰서에서 수사 중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한 대형로펌 형사팀에서 근무하는 변호사는 "아무리 민사갈등이 있는 현장이더라도 경찰은 시민이 물리적인 폭력과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용역의 신분을 확인하고 보호하는 조치를 해야 한다"면서 "만일 경찰이 현장에서 이를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을 경우 직권남용과 직무유기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민들은 방배경찰서가 직권남용과 직무유기를 했다고 판단, 상급기관인 서울경찰청에 이들에 대한 감찰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또 불송치와 관련해서도 서울중앙지검에 이의서를 계속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choh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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