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여쪽에 담아낸 '앨리스'의 무한한 세계
루이스 캐럴 '앨리스' 본문에 마틴 가드너의 해설
은유와 유희로 가득찬 앨리스 세계 탐험 지도
한국어판 옮긴이 주석과 추가 삽화로 재미 더해
"흰토끼를 쫓아라." 영화 '매트릭스'(1999)의 주인공 '네오'는 이 문장을 읽은 후 진실의 세계에 다가간다. 토끼를 따라 주인공이 '이상한 나라'에 가는 루이스 캐럴(본명 찰스 럿위지 도지슨 1832~1898)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닮은 도입부다. 국내에도 많은 팬이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1988)에도 앨리스의 흔적이 있다. 주인공 자매를 태우는 고양이 버스 모습은 소설 속 웃는 고양이인 '체셔 고양이'를 떠오르게 한다. 환상 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앨리스' 시리즈(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영향력은 이처럼 문학을 넘어선다. 미국 음악가 데이비드 델 트레디치는 '앨리스'를 테마로 화려한 교향곡을 작곡했고, 양자물리학에서는 실체와 분리된 존재로서 '체셔 고양이' 개념을 활용한 이론도 존재한다.
토끼 굴로 뛰어든 소녀의 모험기가 이토록 광범위한 영역에 영감을 준 까닭은 무엇일까.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 교수였던 캐럴은 표면적으로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를 썼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 복잡한 비유와 상징, 풍자와 유머를 모두 읽어 내려는 애호가, 연구자들이 세계 각 지역에 '루이스 캐럴 협회'를 만들 정도로 매혹적인 문제들이다. 덕분에 1865년 출간된 이후 174개 언어로 번역된 '앨리스'는 지금까지도 그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신간 '앨리스 인 원더랜드(Alice in Wonder Land)'는 그런 앨리스 세상을 깊이 탐험할 수 있게 돕는 일종의 지도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캐럴 연구자인 마틴 가드너가 집대성한 해설집 '150주년 기념 디럭스 에디션 주석 달린 앨리스'(2015)를 한국어로 옮겼다. 1960년 첫 출간 이후 세 번에 걸쳐 고쳐 쓴 '주석 달린 앨리스'의 150주년 기념판은 가드너의 마지막 연구까지 망라한 최종판이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소설 본문(짝수 쪽)과 주석(홀수 쪽)을 나란히 실었다. 존 테니얼(1820~1914)의 원작 삽화를 포함해 전 세계 유명 삽화가들의 300컷이 넘는 작품이 수록돼 앨리스의 모습을 비교하며 읽을 수 있다.
책의 핵심은 370개에 달하는 가드너의 주석이다. 캐럴의 집필 당시 배경 설명은 물론이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대목에 관한 과학적·철학적 해설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을 앨리스의 세계로 보다 깊이 이끌고 들어간다.
미지의 시공간에 떨어진 앨리스가 구구단을 잘못 외우는 장면에 대한 수학적 해석은 흥미로운 주석 중 하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앨리스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되뇐다. "사오는 십이, 사륙은 십삼, 사칠은… 이런 세상에! 이래서는 20까지 이르지 못할 거야!" 구구단을 틀리게 외운 앨리스를 '이상하다' 정도로 여길 수 있지만 가드너는 '이 세계가 10진법이 아니라면'이란 가정을 제시한다. "18진법일 경우 4×5는 실제로 12고, 21진법으로 4×6은 13이다. 이 과정을 계속 진행해서 항상 진법을 3씩 늘리면 답이 계속 1씩 증가하는데, 답이 20에 이르러야 이 진행이 처음으로 빗나간다." '이상한' 구구단이 어떤 세계에서는 합리적일지 모른다.
정치적 풍자도 곳곳에 숨어 있다. 쐐기벌레 앞에서 앨리스가 읊는 시 '당신은 늙으셨어요, 윌리엄 신부님'은, 로버트 사우디(1774~1843)의 교훈시 '노인의 안락과 그 연유'를 각색한 시다. "당신은 늙으셨어요"라는 청년의 말에 신부가 "이젠 골이 비었다고 확신한다네"라고 답하는 내용을 담았다. 부패한 성직자에 대한 캐럴의 비판 의식이 엿보이는 패러디 시로 다시 읽힌다.
한국어판에는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인 승영조의 주석 386개도 더해져 이해를 돕는다. 당대 영어의 말맛을 적확히 전달하기 위한 부연, 역사적 사실이나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한 설명, 그리고 문학 평론의 성격을 띠는 해설 등을 골고루 풀어냈다. 승영조 번역가는 한국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가드너의 장황한 주석에 '뭐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1년 넘게 앨리스에 몰두하면서 치열한 사회 고발 의식이 감춰져 있고, 종교적 깊이도 있는 작품이란 걸 새삼 깨닫고 주석의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했다.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반전된 부분도 있다는 점과 같이 가드너의 주석이 아니면 모르고 지나쳤을 내용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작업으로 "비로소 발견하게 된 여러 패러독스와 패러디의 이면을 독자와 공유하게 된 것이 뿌듯하다"는 그는 독자들이 '앨리스'가 사랑받는 이유를 책을 읽으며 직접 느끼길 바란다고 전했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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