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69> 신곡-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
- 고대 신화·중세 철학부터
- 역사·정치·종교·사회까지
- 온갖 학문과 지혜 넘실대
- 지옥·연옥·천국편으로 나뉜
- 1만4233행 단테의 여행기
- 실존·가상 등장인물 수백 명
- 지옥서 목격한 끔찍한 형벌도
- 천국에서 영접한 신의 사랑도
- 죄짓지 말고 충실하게 살라는
- 현재 삶의 ‘복음’으로 다가와
무신론자여서 이 고전을 꺼려 읽지 않는다면 얻지 못하는 게 여럿이다. 우선 이 책, 1만4233행 대서사시엔 서양 문예가 넘실댄다. 아득한 그리스·로마신화는 물론 중세 유럽 사실(史實), 스콜라 철학, 신학,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비판과 통찰이 번뜩인다. 저자 자신을 포함해 하느님까지 등장한다. 실존·가상 인물도 수백 명. 이해를 돕는 도움 글이 빼곡하다. 이것까지 눈여겨본다면 머릿속에 서양 인문 고전 지식이 켜켜이 쌓인다.
▮사후세계 여행을 그린 대서사시
종교 서적이 아닌 이상 지옥-연옥-천국 위치를 제시하는 게 쉽지 않다. 단테는 얼버무리지 않고 세 좌표를 하늘과 지구에 콕 찍어 놓았다. 참으로 과감한데, 종교가 융성한 시대여서 먹혀들었다. 접근법이 색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선악 이론, 프톨레마이오스 천문관, 중세 지리학을 버무렸다. 한때 신학은 과학을 ‘단두대’로 보냈지만, 저자는 과학과 신학을 손잡도록 만들었다.
신곡(神曲)은 저자가 일주일간 지옥(INFERNO)-연옥(PURGATORIO)-천국(PARADISO)을 경험하고 돌아와 회고하는 형식. 줄글이 아니라 11음절 이탈리아어 삼행시다. 고통스러운 사람이 글을 쓴다고 한다. 단테는 고향에서 내쫓겨 14년여 망명할 때 이 글을 지었다. 일상은 녹록지 않다. 삶에서 ‘지옥-연옥-천국’을 겪는다. ‘신곡’은 그런 현세를 비춘다. 현대인은 이 고전에서 ‘절망-희망-행복’에 대한 거대한 은유를 체험한다. 단테는 뚜렷한 내세관을 드러낸다. 인간은 자신 의지와 하느님 사랑으로 기쁨을 느낀다는 뜨거운 신심이다. 그는 성서와 역사를 통해 세계를 밝게 내다봤다.
이탈리아인들은 단테를 자랑스러워한다. 그가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저자 고향인 피렌체에서 쓰는 언어로 썼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당시 유럽 유명인이 애용한 언어는 라틴어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우아한’ 언어였으니까. 단테는 왜 라틴어를 버렸을까. 그는 시민이 자치하는 도시인 피렌체에 살았다. 그러다 덜컥 교황과 황제가 벌이는 정쟁에 엮였다. 피렌체 법정은 단테를 내쫓았고 그는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헤맸다. 그때 쓴 글이 신곡이니, 유럽판 유배 문학 작품. 단테는 고향이 그립다. 라틴어가 아닌 그곳 토박이 언어를 선택한 건 인지상정. 자신이 흘렸던 눈물과 희망, 진리와 정의를 향한 외침을 활자로 바꿨다.
신곡 집필 기간은 1307~1321년, 죽기 직전까지로 14년여 걸렸다. 아쉽게도 전하는 육필 원고가 없고 죄다 필사본. 16세기 중반까지 나온 필사본이 800종을 넘는다. 성경 다음으로 많다. ‘데카메론’을 쓴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는 단테 추종자로 1360년께 ‘신곡’ 필사본을 남겼다. 그는 단테 연구학자였다. 단테가 죽은 지 52년째인 1373년, 보카치오는 서명(書名)을 더 묵직하게 만들었다. 책 이름 앞에 ‘거룩한(divina)’이란 형용사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피렌체 당국이 받아들였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단테가 맨 처음 달았던 이 고전 이름은 ‘코메디아’. 당시 피렌체 말로 Comedia,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Commedia. ‘희극(喜劇)’이란 뜻. 현 서명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때 희(喜)는 ‘우습다’가 아니라 ‘기쁘다’는 의미. 코메디아는 ‘기쁜 얘기’로 번역된다. 왜 기쁜가. 저자는 소망대로 하느님 사랑을 얻기 때문이다. 신곡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어쨌거나 당시는 서명이 밋밋하다는 게 중론. 보카치오가 나섰다. “서명에 ‘거룩한’이란 단어 정도는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보카치오는 강연을 다니며 이렇게 외쳤다. 그 메아리가 1555년으로 날아가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인쇄되는 이 책에 ‘La divina commedia’라는 서명을 새겼다. 현대에서 한자권 번역본은 대개 ‘신을 찬미하는 노래’라는 뜻인 ‘신곡’을 서명으로 삼는다.
▮저승으로 간 단테,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줄거리를 살펴보자. 지옥 편 1곡은 서문이다.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으니/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둘째 연이다. ‘아, 얼마나 거칠고 황량하고 험한/숲이었는지 말하기 힘든 일이니,/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신곡은 ‘고전 중 고전’이다. 이 두 연, 단테가 숲속에서 헤매는 장면에서 너대니얼 호손(1804~1864)이 쓴 ‘주홍 글자’(1850년)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 장편 소설엔 청교도 마을 청년 목사인 아서 딤스데일이 나온다. 그는 유부녀 헤스터 프린과 정을 통한다. 프린은 친부를 밝히지 않고 아이를 낳아 주홍 글자 표식을 단 간통녀로 전락한다. 목사가 자책하며 어두운 마을 숲속을 헤매며 괴로워하는 그 장면!
지옥 편 시점은 1300년 부활절 직전인 4월 7일(성금요일)이다. 35세 단테는 황량한 숲속에서 로마 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이성을 상징하는 그는 단테를 저승으로 이끈다. 천국 성녀인 베아트리체가 지옥 림보에 있는 베르길리우스를 불러 곤경에 빠진 단테를 데려오랬다.
지옥은 어디인가. 예루살렘 아래다. 입구를 통해 지표에서 중심으로 내려간다. 갈수록 반경이 좁아지는 깔때기 같다. 두 시인은 하루 일정으로 지옥을 둘러본다. 9개 원(圓) 구역으로 나뉘는데, 죄가 가장 가벼운 영혼이 제1 구역(림보)에 산다. 베르길리우스를 포함한 시인, 고대 철학자, 그리스 영웅 등이 거주자. 그들은 하느님을 몰랐고 세례도 받지 않아 형벌은 면하지만, 천국엔 못 가는 신세다. 예수 부활 이전 시대에 훌륭하게 살았지만 말이다. 단테가 그려놓은 죄질에 따른 벌과 거주지가 흥미롭다. 두 시인은 지옥 밑바닥인 주데카를 본 후 지구 중심을 지나 좁은 동굴을 거쳐 남반구를 향해 기어올라 연옥 해변에 닿는다.
연옥 편. 연옥은 남반구 대양 한가운데 솟은 산이다. 연옥 입구를 지키는 천사는 단테 이마에 P자 7개를 새긴 후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연옥으로 들여보낸다. P자는 가톨릭 교리상 7대 죄(교만 질투 분노 나태 인색 탐식 음욕). 연옥 산에는 일곱 ‘둘레’에서 일곱 가지 죄를 범한 영혼들이 벌을 받으며 지상 천국인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시인 스타티우스는 죄를 씻고 천국에 가는 영혼. 그가 합류해 세 시인이 지상 천국에 닿는다. 30곡에서 단테가 옛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 순간 베르길리우스는 사라지고. 단테는 에우노에강물을 마시고 하늘로 간다.
천국 편. 신앙 그 자체인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데리고 하늘(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을 각각 찾아간다. 여덟 번째 방문지는 붙박이별 하늘. 여기서 저자는 발아래 일곱 행성(당시는 태양을 행성이라고 봤다)과 작디작은 지구를 내려다본다. 그다음 올라간 곳은 아홉 번째 이자 최고 하늘인 엠피레오. 여기서 단테는 하느님 성모 마리아를 보고, 베아트리체는 자기 자리로 올라간다. 단테는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해 눈이 더욱 밝아져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빛을 바라보게 된다. 삼위일체 신비와 우주를 움직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다고 썼다.
신곡 마지막 대목은 단테가 지옥-연옥-천국을 둘러본 소감이다. 그 4행은 이렇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단테는 지옥-연옥-천국이 현존한다며 ‘신곡’을 써 그걸 널리 알렸다. 구구절절 생전에 죄를 씻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외쳤다. 인류는 스스로 다스려 삶을 성찰하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세계 평화와 정의를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목소리를 느낄 때 ‘신곡’은 고달프고, 앞만 바라보며 질주하는 현대인에게 삶을 정화하는 복음서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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