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누구를 위한 ‘헌법 정신’인가
‘검사 윤석열’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계기는 2013년 10월 열린 국회 국정감사였다. 박근혜 정권 시절 당시 증인으로 나와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검찰 수뇌부가 압력을 행사했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던 의원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상관의 지시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검찰 조직문화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민들은 그의 ‘사이다 발언’에 환호했고 윤석열 검사는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 윤석열’이 그때 발언을 다시 소환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말 비서관 출신 차관 내정자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나에게 충성하지 말고 헌법정신에 충성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성향과 행보를 고려하면 이런 주문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법과 질서, 자유민주주의를 늘 강조해온 그로서는 당연한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 대통령, 그리고 윤석열 정부는 진정으로 헌법정신에 충성하고 있을까.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로 시작하는 취임 선서처럼 헌법정신을 지켜나가는 것은 대통령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하지만 지난 1년여간 대통령의 언행을 되짚어보면 헌법정신과 어긋나는 사례들이 적지 않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헌법 21조가 규정하고 있는 ‘언론·출판과 집회 결사의 자유’는 윤석열 정부 들어 심각하게 훼손됐다. 윤석열 정부에 비판적이고 불편한 관계에 있는 매체에 대한 ‘뒤끝 작렬’이 이어진 것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9월 미국 방문 도중 불거져 나온 ‘바이든/날리면 논란’이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MBC 사장 등을 대통령 명예훼손으로 형사고발했고, 대통령실은 MBC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 불가를 통보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출근길 문답에서 윤 대통령은 전용기 탑승 배제 이유를 묻는 질문에 “MBC가 가짜뉴스로 동맹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악의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대통령의 헌법 수호 책임의 일환으로 부득이하게 행한 조치”라고 답했다. MBC 기자가 ‘무엇이 악의적이냐’고 재차 질문했으나 답은 없었고, 취임 초 언론과의 소통을 강조하면서 시작한 출근길 문답은 불과 6개월 만에 끝나버렸다.
MBC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임명권을 갖고 있는 방송통신위원회 흔들기는 예상된 수순이었다. 한상혁 위원장을 면직 처분하고 그 자리엔 MB 정권 당시 ‘방송 장악의 장본인’인 이동관 대통령실 대외협력특보를 앉힐 예정이다. 대통령실 권고로 시작한 ‘KBS 수신료 분리징수’는 절차상 하자가 수두룩한데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비판적 매체의 쓴소리를 틀어막으려는 속 좁은 보복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한술 더 떠 한 여당 의원은 최근 이슈로 떠오른 서울~양평 고속도로 의혹을 제기한 경향신문 등의 기사를 근거 제시도 없이 가짜뉴스로 몰아붙이며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겁박했다. 정당한 집회를 불법으로 몰고, 야간 시위 금지, 노동자에 대한 폭력적 진압과 체포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대법원장이 대법관 임명 제청을 하기도 전에 “특정 후보 2명에 대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지 대통령실에서 검토했다”는 지난달 경향신문 보도는 눈과 귀를 의심케 한다. 이는 삼권분립 원리에 위배되는 것은 물론 사법권 독립을 해치는 위헌적 처사다. 고위공직자 인사검증 체계 개편에서 시작된 ‘시행령 통치’는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 야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응한 정부의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 복구) 추진으로 확대됐다.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는 헌법 제40조를 무색하게 한다.
차병직 변호사 등이 쓴 <지금 다시, 헌법>에는 헌법의 존재 가치를 서술한 대목이 나온다. “수천 개의 법령은 헌법 아래 있고 헌법은 법들을 지휘하고 감독한다. 헌법이 힘겨우면서도 영예로운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직 우리의 인간다운 삶에 봉사하기 위해서다.” 유달리 ‘헌법정신’을 강조하는 윤 대통령이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다.
이참에 높은 분들에게 부탁 하나 해볼까 한다. 헌법정신을 지키기 힘들면 차라리 제헌절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일이라도 해보면 어떨까. 그나마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헌법 제10조와도 부합하니 말이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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