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칼럼] 실손의료보험 청구간소화와 의료민영화
6월 13일 실손의료보험 청구간소화를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된 지 14년 만에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했다. 청구간소화란 환자가 요청하면 의료기관이 보험금 청구 서류를 제3의 중계기관을 통해 보험회사에 전송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제도다. 그런데 의료계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사회단체도 반대한다. 특히 환자단체, 노동계, 진보적 시민사회, 공익 전문가들은 이 법안이 ‘의료민영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될 개연성이 있는지 따져보자.
2005년 유출돼 큰 파문을 일으켰던 ‘삼성생명 내부전략보고서’에는 보험업계가 추구해 온 민간의료보험의 단계별 발전 전략이 잘 기술돼 있다. 6단계로 구성됐는데, (1단계)정액방식의 암 보험, (2단계)정액방식의 다질환 보험, (3단계)후불방식의 준 실손의료보험, (4단계)실손의료보험, (5단계)병원과 연계된 부분 경쟁형 의료보험, (6단계)정부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의료보험이 그것이다. 2005년 당시는 손해보험회사만 실손의료보험 상품을 판매할 수 있던 3단계에 해당했다. 그런데 2005년 보험업법 개정으로 생명보험회사도 실손의료보험 상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2007년부터 민간의료보험은 4단계에 접어들었다.
곧바로 보험업계는 5단계 실현을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참여정부 때 유시민 장관이 내놓은 ‘의료법 개정안 제61조’가 그것인데, 핵심은 보험회사가 비급여 진료에 대해 의료기관과 직접 계약할 수 있도록 규정한 부분이었다. 우리나라는 의료법 제27조에서 ‘누구라도 영리를 목적으로 환자를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에게 소개·알선·유인하는 행위 및 이를 사주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다. 따라서 보험회사는 가입자를 매개로 의료기관과 계약할 수 없다. 그런데 유 전 장관의 ‘의료법 개정안 제61조’는 예외를 두어 보험회사가 의료기관과 직접 계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했다. 당시 시민사회가 격렬하게 반대했고 결국 무산됐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같은 시도가 있었지만 시민사회 저항과 국회 반대로 거부됐다.
민간의료보험 5단계인 ‘병원과 연계된 부분 경쟁형 의료보험(국민건강보험과 경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작동 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이게 가능해지려면 다음의 두 가지 조치가 필요하다. 첫째, 국민건강보험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대응하는 민간의료보험의 심사평가기구가 필요하다. 국민건강보험에서 의료기관은 심평원에 진료 자료를 전송하고, 심평원은 심사평가를 통해 지급액을 결정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한다. 국민건강보험은 심사평가를 통해 국민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보험재정을 알뜰하게 관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민간의료보험은 보험회사의 이익과 영향력 극대화를 위해 심사평가 기전을 활용하길 원한다. 이는 미국식 민간의료보험 체계로 가기 위한 필수 관문인데, 우리나라 보험업계의 숙원이다. 이것이 갖춰지면 민간의료보험 5단계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의료기관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처럼 보험회사도 계약을 맺도록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보험회사는 가입자를 매개로 의료기관과 의료서비스의 내용 및 가격을 계약하게 되는데, 여기서 심사평가 기전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미국식 민간의료보험 체계인데, 바로 ‘의료민영화’다. 현행 민간의료보험은 보험회사가 가입자와 실손보험 계약을 맺고 의료 이용에 대해 약관에 따라 산출된 비용을 지급하는 사적 계약 관계다. 여기서 의료기관은 보험회사와 무관하며, 보험회사 제출용 자료를 환자에게 발급할 따름이다. 이는 민간의료보험이 국민건강보험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인데, 민간의료보험 5단계로 올라설 수 없게 한다. 그런데 보험업법이 개정되면 의료기관은 보험회사의 심사평가기구에 진료 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이것이 제도화되면 보험업계는 미국식 민간의료보험 구축이라는 오래된 꿈에 성큼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바로 민간의료보험 6단계의 모습이다.
국민건강보험은 건강보험 급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민간의료보험은 비급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으로 영역이 달라 5단계나 6단계로 가진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틀렸다. 대다수 최신 의료기술은 도입 직후 곧바로 비급여 서비스로 분류돼 국민건강보험이 아닌 민간의료보험의 상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간의료보험에 편입된 최신 의료기술은 국민건강보험의 급여 항목으로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데, 더 최신의 신기술에 밀려나서 가격이 인하될 때라야 국민건강보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런 제도 여건에서 비싼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 중상층 국민은 국민건강보험에 더 많은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의료보장은 양극화되고 양질의 보편적 의료안전망은 사라지게 된다. 결국 실손의료보험 청구간소화는 가입자의 작은 불편을 덜어주는 데만 머물지 않고 민간의료보험에 제도적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장차 민간의료보험 5단계와 6단계가 허용될 것이고, 국민건강보험은 위축될 게 자명하다. 우리는 이것을 보험재정 측면의 ‘의료민영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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