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1970년대, 발굴과의 만남

기자 2023. 7.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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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오천년전’ 미국 순회전을 보도한 경향신문 1979년 5월9일자.

2년 전 공주에선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이 열렸다. 올봄 경주 도심에선 천마총 발굴 50주년 행사들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그 일환으로 마련된 국립경주박물관의 특별전 ‘천마, 다시 만나다’가 이번 주말 막을 내린다고 한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50년 전이라고 하면, 1970년대다. 사람들은 197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박정희와 유신과 10·26,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 중동 건설 붐, 대연각 호텔 화재, 현대자동차 포니의 탄생, 권투선수 홍수환과 축구선수 차범근,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 등…. 저마다 기억이 다르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공주 무령왕릉 발굴(1971), 천마총 발굴(1973), 경주 황남대총 발굴(1973~1975), 고령 지산동 44호분 발굴(1977), 신안 해저유물 발굴(1976~1984) 등이다.

무령왕릉에선 5200여점, 천마총에선 1만1500여점, 황남대총에선 5만84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제와 신라의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들이다. 신안의 증도 앞바다에서 11차례에 걸쳐 진행된 신안 해저 유물 발굴은 국내 최초의 수중발굴이었다. 신안해저선에선 중국 도자기 등 2만4000여점과 28t에 이르는 동전이 나왔다. 이 발굴이 있었기에 우리는 수중발굴의 강국이 되었다. 지산동 44호분에선 36명 이상의 순장자가 확인되었다. 이렇게 많은 가야인들이 순장되었다니, 놀라운 기록이다.

지금이야 문화재, 발굴, 박물관과 같은 용어가 익숙하지만, 1970년대엔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고분 발굴 경험 부족으로 무령왕릉을 하룻밤 사이 졸속 발굴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 조사는 경주관광개발계획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고고학적 발굴은 이런 과정을 거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우리 전통미술의 정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0년대 당시 대중들에게 발굴 소식을 전달하는 주요 통로는 신문이었다. 일간지들은 발굴 뉴스를 열심히 다루었고 이를 통해 대중들은 발굴의 매력과 전통 미술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건 낯설면서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독자들의 반응에 고무된 일간지들은 문화재와 발굴에 관한 다채로운 기획물을 선보였다. 찬란하고 세련된 고분 출토 유물들은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1970년대 후반엔 일본과 미국에서 ‘한국미술 오천년전’이 열렸다. 일본 순회전은 1976년 2월부터 7월까지 교토, 후쿠오카,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전시장을 찾은 일본인은 57만명이었다. 미국 순회전은 1979년 5월부터 1981년 9월까지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클리블랜드, 보스턴, 뉴욕, 캔자스시티, 워싱턴 등 8개 도시에서 열렸고 226만여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당시 대부분의 일간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 소식을 열심히 전했다.

일본과 미국 순회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출품 유물들이 돌아올 때, 일간지에선 “금의환향”이란 표현을 썼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귀국전이라는 타이틀로 해외순회전 출품 유물들을 그대로 전시했고 관람객들은 출품 유물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 대목에서, 그 무렵 유행했던 운동선수들의 카퍼레이드가 떠오른다.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을 쟁취하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친 홍수환. 그를 환영했던 카퍼레이드는 당시 대한민국의 축제였다. 해외순회전을 마치고 돌아온 문화재도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할까. 197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졸속 발굴의 오명도 있고 정치이데올로기의 개입도 있었지만, 대중들이 발굴과 전통 미술의 매력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그게 벌써 50년 전 일이 되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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