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정치는 왜 존재하는가

기자 2023. 7. 14. 0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국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은 ‘정치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은 다음 달래고 조정해서 타협시키는 것’이라고 봤다. 미국 정치학자 스콧 아들러와 존 윌커슨은 정치의 역할이 사회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정치의 역할을 갈등의 조정과 문제의 해결이라고 한다면, 지금 한국에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관후 정치학자

정치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일을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부족 정치, 진영 정치, 팬덤 정치, 패거리 정치 등 뭐라고 부르든, 사실 여기에 정치는 없다. 최근 몇달 사이 국민들의 삶에서 중요한 일은 전세사기 문제였다. 만약 정치가 존재했다면, 정부·여당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면서 이전 정부의 실책을 공격했을 테고, 야당은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정부를 비판하면서 처음부터 피해자 면담과 전수조사에 당력을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정당은 반대로 행동했다. 정부는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사회적 재난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거래 문제라며,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인 주거권을 대놓고 무시했다. 그렇다고 야당이 의욕을 보이지도 않았다. 피해자들이 목숨을 끊으며 억울함을 호소하기 전까지 야당은 어떤 적극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사태를 해결하기보다 겨우 현상유지만 시켜놓은 수준의 법을 통과시킨 후에는 여야는 이 문제를 싹 잊었다. 올해 말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깡통전세 문제에 대해서는, 사전에 사태를 방지하기보다 이를 어떻게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느냐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후쿠시마 오염수나 서울~양평 고속도로 문제는 어떤가? 사실 이 두 가지는 국민의 삶에 직결되는 사안이다. 문제는 접근과 해결 방식이다. 불과 3년 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강력히 반대했던 국민의힘은 철면피들처럼 입장을 바꿨다. 김기현 대표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당시 주장은 지금 야당과 판박이처럼 같다.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 대해 어떤 설득력 있는 과학적 근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가짜뉴스’ 프레임으로 일관하는 중이다. 야당은 전 국민의 85%가 반대하는 사안을 ‘민주당의 이슈’로 축소시켜 버렸다. 오염수 방류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조차 민주당이 나서자 다시 생각해 볼 정도다. 문재인 정부 당시의 입장과 달라진 것이냐는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는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서울과 경기도 시민들의 불편이 본질이다. 정부·여당은 노선 변경 과정을 상세히 밝힐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판을 엎어버렸다.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직을 걸겠다는 식의 무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야당은 노선변경에 따른 이용자들의 불편을 강조하기보다는 비리 여부에만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여당의 물타기 전술에 말려들었다. 시·종점은 물론 전체 노선의 50% 이상이 바뀌고, 국도 6호선의 상습정체 해소라는 본래 목적이 사라진 이 노선 변경에 대해 야당이 정공법으로 대처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둘러싼 문제는 더욱 한심하고 답답하다.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가 단순히 ‘킬러 문항’ 몇 개를 없애서 해결된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정부·여당은 대통령이 마치 최고의 교육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지시사항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다. 부끄럽다 못해 딱한 지경이다. 야당은 이에 대해 맹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사실 킬러 문항 폐지는 민주당 대선 공약에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해본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수능이 어려워서 문제라고 했다면, 민주당은 지금 여당과 다른 태도를 보였을까?

정치가 이 수준일 때, 국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며칠 전,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일터에서 추락해 숨졌다. 20년 전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이듬해부터 아들은 조선업계에서 일해 왔다. 그리고 같은 유형의 사고를 당했다. 고인의 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어려서 잘 모르고 눈물만 흘렸다. 이제 형까지 같은 사고를 당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우리 가족의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한 해 동안 ‘322명’의 노동자가 ‘추락’으로 ‘사망’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넘었고 10대 건설사 중 9곳에서 사망자가 나왔지만 기소된 곳은 없다.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누군가의 탓을 하기보다 현장 실태와 제도의 허점을 살피고,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쟁점을 조정해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런 곳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국회 다수당이 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관후 정치학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