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의 한 씻었지만… 고인 향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

김정호 2023. 7. 1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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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는 선고했지만 국가는 사과하지 않았다.

1980년 사북항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고 기소까지 됐던 4명의 광부가 43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고문 등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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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피해자 43년만에 무죄
재판부 “폭력사태 동참 단정 못해”
유족 제시한 재심 무죄 ‘첫 사례’
‘사과’ 빠진 증거불충분 아쉬움
▲ 13일 고(故) 오항규·고(故) 진복규·고(故) 양규용·고(故) 박노연씨 등 4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가운데 사북항쟁동지회 및 유가족이 춘천지법 원주지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무죄는 선고했지만 국가는 사과하지 않았다.

1980년 사북항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고 기소까지 됐던 4명의 광부가 43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고문 등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춘천지법 원주지원 형사1부(이수웅 부장판사)는 13일 소요죄, 포고령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처벌받은 고(故) 오항규(당시 48세)·고(故) 진복규(당시 45세)·고(故) 양규용(당시 41세)·고(故) 박노연(당시 31세) 씨 등 4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의 이유는 ‘증거불충분’이었다. 재판부는 4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사북항쟁 당시 불법집회 등 단체행동을 하거나 소요행위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으며 4명의 당사자들이 현장에는 있었으나 일부 광부들의 우발적인 폭력사태에 동참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 광원과 가족 등이 열악한 근로 환경과 어용 노조에 반발해 벌인 탄광 근로자들의 총파업 투쟁이다. 오항규·진복규 씨는 ‘사북 사건(항쟁) 합당수사단’에 의해 수사를 받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양규용·박노연 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아 1980년 8월 형이 확정됐다.

이번 재심은 당사자의 유가족이 신청했으며 당사자인 오항규씨는 2005년, 진복규씨는 1992년, 양규용씨는 2010년, 박노연씨는 2018년 각각 사망했다. 사북 항쟁 국가폭력 희생자인 당사자가 아닌 유족이 제기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사북 항쟁 주동자로 처벌받은 이원갑(당시 40세)·신경(당시 38세) 씨가 2015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받은 데 이어 2021년 황한섭(당시 41세) 씨, 지난해 강윤호(당시 33세) 씨 등 4명도 재심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사북항쟁동지회는 이번 무죄판결을 반기는 한편 앞서 세 차례의 무죄판결과 다르게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가 이뤄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황인오 사북항쟁동지회장은 “피해자들이 이미 사망한 상황에서 이제야 무죄판결이 난 부분에 대해 유감이면서 그래도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감사하다”며 “하지만 앞서 세 차례의 재심 선고에서는 국가 폭력에 대한 재판부의 사과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런 부분 없이 증거불충분이라는 사유만으로 무죄 판결이 난 부분은 매우 아쉽다”고 지적했다.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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