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無道한 세상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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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헌문(憲問)편은 이런 문답으로 시작합니다.
憲問'恥'. 子曰: “邦有道, 穀: 邦無道, 穀, 恥也.”
(헌문치, 자왈, 방유도, 곡, 방무도, 곡, 치야)
아주 단순한 문장이고, 매우 지당하신 공자님 말씀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해석하기에 따라 많은 편차를 보이는, 의외로 난해한 글입니다. 일단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될 것입니다.
헌(憲)이 부끄러움에 대해 질문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 녹(祿)을 먹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녹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나 없을 때에나 국가로부터 녹을 먹는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다… 얼핏 이런 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상으로 출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은둔하려는 처사(處事)에게서 나오는 말처럼 보여집니다.
공자가 이런 말을 하셨다는 것일까요? 평생 세상에 뜻을 펼치기 위해서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을 설득하던 공자의 말치고는 매우 도가적(道家的)인 분위기가 풍기는 듯 합니다. 세상으로 나와 녹을 바랄 생각을 하지 말라. 벼슬을 하지 말라!
헌(憲)이란 인물은 공자의 제자 원헌(原憲), 즉 자사(子思)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의 성품과 기질에 따라 조금씩 다른 답변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과연 자사의 그 후 행적을 보면 그는 무도한 세상에서 녹을 먹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한 성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사가 노(魯)와 위(衛) 등지에서 관리로 지낸 것은 ‘논어’ 옹야(雍也)와 ‘맹자’ 고자 상(告子上) 고자 하(告子下) 같은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의하면 공자가 죽은 뒤에 풀이 우거진 늪지대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해서 산 것이죠.
이렇듯 자사는 세속의 부귀영화에 초연하면서 청빈을 숭상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성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공자는, 관직의 말단에 붙어있으면서 행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던 자사가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위와 같이 대답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사의 질문이란 아마도 자아와의 끊임없는 문답을 거친 처절한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아아, 부끄럽습니다 선생님! 우리 노공(魯公)의 정치력은 저 사가 세족 계씨(季氏)의 전횡에 파묻혀버렸고, 가신(家臣)들은 늘 주군을 배반하기를 밥먹듯이 하며, 천하는 창칼 부딛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국인(國人)들은 실의에, 민초들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학문을 배워 출사(出仕)해 뜻을 펴 보려는 일이 이미 부질없이 돼 버렸나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공자는 이런 제자에게 무슨 뜻으로 이와 같은 대답을 했을까. 주주(朱註)는 그 미묘한 의미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홀로 선한 일을 하지 못하면서, 다만 녹을 먹을 줄만 아는 것은 모두 부끄러울 만한 일이다.’
그렇습니다. ‘녹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녹만 먹고 있는 것’이란 뜻으로 읽으니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그러니까 나라에 도(道)가 행해지든 말든, 합리적이고 예측가능하며 국민들의 바람을 충분히 받아들인 정책 위에서 모든 것이 행해지든 말든, 지금 아니면 언제냐는 식으로 눈먼 자금을 모아 호주머니로 챙기는 사람들이 호형호제로 똘똘 뭉쳐있든 말든, 그저 나는 정시에 출근해서 구내식당 밥 먹고 정시에 퇴근하고 그저 봉급 보너스 받으면 그만이라는 복지부동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 되겠군요. 주주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원헌(=자사)의 지조는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녹을 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알고 있었지만,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녹만 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그의 질문으로 인해 이것까지 함께 말씀해, 그의 뜻을 넓혀서 스스로 힘쓸 바를 알게 하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데 나아가게 하신 것이다.’
도대체 어느 세월에 세상이 유도(有道)한 꼴을 보겠는가! 지금 세상과 마찬가지로, 공자의 시대에도 분명히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역시 비범했습니다. 지금 세상이 무도하다고 절망하지 말라! 우리는 늘 세상을 바로잡을 것을 꿈꾸며 살아야 할 테니. ‘에이, 난 뭐 월급 받은 만큼만 하면 되는데 뭐 열심히 한다고 뭐 수당이 더 나오나?’ 이런 태도를 갖지 말라!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 있다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지.” 공자는, 정녕 그 혼탁한 시대에 홀로 별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침마다 뉴스를 보고 놀라는 일이 일상이 돼 버린 세상이라 해도, 끊임없는 거짓말과 야비한 언어들이 판을 친다 해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행태가 뉴스를 장식한다 해도, 쉽게 절망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 해도 언제나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 원칙과 선(善)을 잃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도(道), 즉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도리(道理)가 지배하는 사회로 근접시키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어’ 태백(泰伯)편에서의 공자의 말은 이 뜻을 보다 확실하게 해 줍니다.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방유도, 빈차천언, 치야, 방무도, 부차귀언, 치야.)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부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자사의 후일담을 좇아가 봅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는 역시 공자의 제자로서 짧은 기간동안 엄청난 부(富)를 축적한(‘사기’ 화식열전) 당대의 벤처기업가 자공(子貢)이 늪지대에 숨어 사는 자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후대 자사학파들이 지어낸 것이라는 의심도 들긴 하지만) 위(衛)나라의 재상이 된 자공은 수레에 네 필 말을 매고 따르는 마부들을 데리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거진 풀을 헤치며 빈궁한 촌락으로 들어갑니다.
자사는 다 해진 의관 차림으로 자공을 만났습니다. 놀란 자공은 자신을 따라온 사람들에게 창피한 생각이 들었던지 자사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병들어 있는 것이오?”
그러자 자사가 말했습니다.
“내 듣기론, 재산이 없는 자를 가난하다고 하며, 도를 배웠으되 행하지 않는자를 자를 병들었다고 합니다. 저와 같은 경우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은 아닙니다.”
자공은 그제서야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우울한 기분으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의 실수를 후회했다고 합니다. 과연 자공 또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의 숱한 ‘자공’들은 아무도 그 자신의 실수를 근본적으로 깨닫거나 후회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방유도(邦有道)인지 방무도(邦無道)인지 하는 전제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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