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 “범죄소설 형식에 나의 진지함 얹혀…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작품”
5년간 쓰고 다듬은 본격 첫 장편추리소설
칼부림 피해자·퇴직 형사 ‘콤비’ 사건 추적
22년 전 골목에서 벌어진 그날 진실 접근
“왜곡된 기억이 일으키는 파장에 포커스
내 문체 좀 덜어내고 속도감 있게 전개”
“지금은 다음에 쓰고 싶은 소설만 생각”
고풍스런 성에 도착한 날이었다. 성은 아름다웠지만, 돌로 된 곳이라서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아직 적응이 덜 된 상태에서 숙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 비에 돌로 된 벽이 젖어들고 있었다. 비에 서서히 젖어 드는 돌벽. 저런 분위기를 담고 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을 매우 좋아했지만, 너무 알맹이 없이 기법으로만 가는 작품이나 너무 잔혹한 건 싫었습니다. 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추리나 범죄소설 형식에 제가 갖고 있는 어떤 무거움을 얹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요. 내용상으론, 이미 여러 단편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스스로 왜곡해 가는 기억들, 자기가 사실이라고 믿는 왜곡된 기억이 얼마나 큰 파급과 파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써 보고 싶었어요. 둘이 만나졌던 거죠.”
소설가 김인숙이 5년간 쓰고 다듬은 장편소설 ‘더 게임’(문학동네)을 최근 펴냈다. 등단 40년을 맞은 그의 첫 본격 장편 추리소설이다.
중견 작가 김인숙은 왜 본격 추리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등단 40년’의 ‘소설 장인’이 펼쳐 보여 주는 추리소설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김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5년 전부터 썼고, 3년 전 연재한 뒤, 최근에야 책으로 묶어 내게 됐는데,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요.
“소설을 쓸 때 어떤 시간이나 장소, 사건을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열려 있어야 (독자들이) 자기 공간으로 상상하거나 자기 경험과 맞물려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은, 장소의 경우 조금 흐려놨지만, 시기를 1994년 여름으로 특정해 놓고 가 버렸잖아요. 주인공 황이만의 나이도 몇 년 생이라고 나오진 않지만, 1994년에 20대였으니까 현재는 40대 초반이라고 설정을 했죠. 그런데 작품이 3년, 5년이 지나면서 주인공도 자꾸 나이를 먹잖아요. 이 사람 생각이 맞나 자주 생각해야 했어요. 소설을 쓰고 출간하는 사이, 주인공이 나이를 먹고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이 발생하는 등 사회도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희한한 케이스였습니다.”
“범인이나 사건의 인과관계는 이미 출간된 중편 ‘벚꽃의 우주’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만, 추리소설이라면 문법상 범인이 정확해야 되는 게 맞지만, 이 소설의 경우 범인보다는 주인공 황이만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요. 황이만 때문에 일어났던 최초의 파동과, 그로 인해 벌어진 비극들을 좀 열어 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인물과 문장이 기존 추리소설과 크게 달라서 많이 놀랐습니다.
“아무리 추리소설을 써도 김인숙의 추리소설이 될 수밖에는 없을 터이니 더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도 제 문장은 살아 있고 제가 해 왔던 시선의 방향이 존재할 것이어서 오히려 더 많이 덜어 내려고 노력을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무엇을 덜어내려 했습니까)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문체를 조금 덜어 내려고 했고, 대신 조금 더 가볍고 속도감 있게 가려고 했어요. 언젠가 편집자에게 제대로 된 B급 추리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B급 추리소설이 되기 위해선 스킬과, 능란함과, 배짱과, 능청스러움도 있어야 하는데, 저는 수줍은 사람인 거예요.”
―이번 작품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보도 자료엔 ‘본격적으로 시도한 첫 추리소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단편에도 추리 기법이 들어간 작품이 있고, 중편 ‘벚꽃의 우주’도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제가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작품을 이번에 쓴 것 같아요. 온전히 독자가 되고 싶을 때는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을 읽었어요. 제 소설도 그냥 이렇게 읽으면 좋지 않나, 난 왜 이렇게 안 써,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했는데, 금방 쓰기는 어려웠죠. 그런데 이렇게 시작한 것 같아요.”
1963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인숙은 1983년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다. 같은 해 장편소설 ‘핏줄’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꽃의 기억’, ‘봉지’, ‘소현’, ‘미칠 수 있겠니’, ‘모든 빛깔들의 밤’ 등을, 소설집 ‘칼날과 사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단 하루의 영원한 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40년 동안 전업 작가로서 얼마나 많은 것을 썼고 또 얼마나 많이 실패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또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 욕구가 있어서 40년간 계속 쓰고 있는 거잖아요. 거창한 것은 없고, 지금도 다음에 쓰고 싶은 소설만 생각해요. 아마 그게 떨어지는 순간, 끝이겠죠. 지금도 딱 한 곳만 생각해요. 다음번 장편으로 이런 것을 써 봐야지, 하고.”
인터뷰에서 조금 펼쳐서 보여 준 그의 세상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등단 이후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니, 삶의 격정이 폭풍처럼 몰려왔다니, 아직도 화가 난다니. 거기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은 것이라거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게 있을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건 매우 이른 시기에 등단했다거나, 화려한 조명 속의 있던 그의 모습만을 생각한 단편적이고 피상적 사고에 대한 한 총체적 인간의 통렬한 반격이자, 다채로운 삶의 실존적인 복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자에게 남은 희망 가운데 하나는 오랫동안 도서관을 좋아했고 여전히 도서관에서 꿈을 키워 가는 도서관 키즈라는 그와의 일치였고, 다른 도서관 키즈를 위해서 조그만 일이라도 해 보자는 소박한 의기투합이었다. 그는 이전에 사는 곳에선 10분만 걸어도 도서관이 있었지만, 서울에선 오히려 쉽게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기자 역시 서울에 살고 있음에도 경기도 도서관을 다니고 있다고 한탄했고. 그리하여 그날 우리는 서울의 도서관 문제를 짚는 글을 각자의 방식으로 쓰기로 의기투합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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