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독설부가 된 외교부 [슬기로운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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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를 처음 출입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피지(PG·프레스 가이던스)라는 이름으로 내는 입장문이었다.
민주당이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태평양 도서국들에 국제적 연대를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하자, 외교부는 "대외적 차원에서 헌법상 행정부가 가진 고유의 권한을 존중하지 않은 것으로서, 국가 외교 행위의 단일성이라는 측면에서 맞지 않아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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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신형철 | 통일외교팀 기자
외교부를 처음 출입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피지(PG·프레스 가이던스)라는 이름으로 내는 입장문이었다. 궁금한 사안들을 담아 성심성의껏 질문하면, 외교부는 반나절쯤 지나 “우리 정부는 ○○○(해당 국가)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긴밀한 소통을 하고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답답한 마음에 브리핑 자리에서 “그래서 자세한 내용은 언제 알려주느냐”고 물으면 “적절한 계기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모호함을 더한다. 다양한 경로가 무엇인지, 긴밀한 소통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적절한 계기가 언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전 출입기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어떤 것도 자세히 말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는 외교부발 메시지의 오랜 특징이었다.
취재하는 처지에서야 이런 태도는 답답하지만, 그래도 없는 사실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믿음은 있었다. 민감한 외교 사항은 밝힐 수 없다는 몸부림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그 진중하고 조심스럽던 외교부가 거칠게 바뀌고 있다. 외교의 언어가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독설을 내뱉는다. 심지어 국내를 향해서.
그 시작은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논평을 냈을 때였던 것 같다. 민주당이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태평양 도서국들에 국제적 연대를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하자, 외교부는 “대외적 차원에서 헌법상 행정부가 가진 고유의 권한을 존중하지 않은 것으로서, 국가 외교 행위의 단일성이라는 측면에서 맞지 않아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정부부처가 야당에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심각한 국익 손상 행위이자 외교를 대통령 권한으로 인정한 헌법의 원칙과 취지에도 어긋나는 매우 부적절한 행위”라고 밝힌 것을 풀어 쓴 듯한 내용으로.
이달 들어서는 사법부가 타깃이 됐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지급될 배상금(판결금)을 한국 기업들이 지급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안’에 반발해 일부 피해자들이 판결금 수령을 거부하자, 정부 쪽은 판결금을 법원에 공탁했다. 하지만 지난 3일 광주지법 공탁관이 판결금 공탁 불수리 결정을 내리자, 외교부는 “공탁 공무원의 권한 범위를 벗어난 것이자 헌법상 보장된 법관으로부터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법원은 ‘본인이 원치 않는 제3자 변제는 허용하지 않는다’며 불수리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했지만, 외교부는 이를 ‘공탁관 개인 의견’이라며 법리 논쟁이라도 벌이자며 발끈하고 나선 모양새였다. 하지만 전주지법, 수원지법, 안산지원 등에서 줄줄이 공탁금 불수리 판단이 이어졌고, “공탁관 개인의 판단이었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외교부는 머쓱해진 상황이 됐다.
이렇듯 거칠어진 외교부의 모습에 혼란스러운 것은 기자들뿐일까. 요즘 외교부 내부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말들이 들려온다. ‘본부가 가장 위험한 험지’라며 ‘차라리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같은 격오지가 낫다’는 반응까지 나온다고 한다. 외교부 본부는 공관에 비해 업무 강도가 세다. 수많은 부처와 엮여 일을 해야 하고 시차라는 어려움 속에서 각국 공관들과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전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선호국 공관 근무 이야기까지 나오는 게, 국내 정치 관여가 아닌 ‘외교’를 하고 싶어서는 아닌지란 생각은 기자만의 것일까.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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