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9개 정권 거치며 전자정부 완성… "미적대는 공무원에 협박도 했었죠"

안경애 2023. 7. 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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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석 고려대 명예교수·디지털플랫폼정부위 자문위원장
'한국 IT대부' 성기수 박사와 KIST 전산실 꾸려 전자정부 설계
청조근정훈장·명예의 전당 헌액도… "대통령 복 타고난 것같아"
전자정부 핵심은 생산성 혁신, 5000만 인구로 5억 힘 발휘 가능

"첫 장면은 1961년의 어느 날이에요. 대학입시를 보러 9시간 완행열차를 타고 시골에서 상경했는데, 묵기로 한 집을 찾고 예비소집에 가는 게 고난의 연속이었죠. 버스 타는 법을 몰라서 종로에서 당시 서울대 상대가 있던 종암동까지 2시간을 걸어가야 했어요."

안문석(78·사진) 고려대 명예교수 겸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자문위원장이 집필 중인 자서전의 시작 부분을 얘기해 줬다. 당시는 전북 익산에서 서울에 오려면 거의 하루를 잡아먹었다. 부모님은 중요한 시험임에도 서울 지리에 어두운 외동아들을 혼자 보냈다. 서울이 낯설어 헤맸던 안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합격한 후 물 만난 듯 도시의 문물을 흡수했다. 특히 컴퓨터라는 세상과 만난 그는 거기에 빠져들었다. 그는 '한국 IT의 대부'로 불리는 성기수 박사와 함께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를 썼다.

성 박사는 미 하버드대 역사상 최초로 2년 만에 석·박사를 딴 인물이었다. 1963년 하버드대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한 후 그 파괴력을 알아보고 귀국했다.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일하며 컴퓨터의 중요성을 알리는 강연을 했다. 국내에는 컴퓨터라는 물건을 본 이가 하나도 없을 때였다. 성 박사와의 만남이 안 교수의 삶을 바꿨다.

"1967년 대학 졸업 후 행정대학원을 나와 당시 싱크탱크였던 KDA(한국경제개발협회)에서 인턴을 했는데 송인상 KDA 회장이 2년 만에 석·박사를 한 천재가 있으니 잘 보라고 했어요. 금방 친해졌는데 하루는 그가 책상에 'if~ go to~' 같은 걸 쓰고 있더군요. 컴퓨터 언어라는 것을 써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쓰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했어요."

능숙한 직원 두 사람이 전문 계산기로 보름간 계산해야 하는 일인데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본으로 보내면 컴퓨터라는 기계가 해준다는 것이었다.

안 교수는 "안 믿었다.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는 기계가 있나. 바로 홀딱 반했다. 성 박사가 IBM에서 펴낸 '포트란 셀프 매뉴얼'이란 책을 한 권 줬다"고 했다. 구경 한번 못한 컴퓨터를 책으로 배우며 빠져들었다.

안 교수는 "읽다가 비트와 소프트웨어라는 단어에서 막혔다. 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안 나왔다. 성 박사한테 물어보니 나중에 알게 된다고만 했다"고 했다.

성 박사와 안 교수는 자리를 옮겨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산실을 만들었다. 한국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산업의 산실로 꼽히는 곳으로, 나중에 시스템공학연구소로 독립했다가 쪼개져서 ETRI(전자통신연구원)와 KISTI(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흡수된 조직이다. 경영대학원을 나온 석사 2명을 포함해 총 4명으로 전산실이 출발했다. 종로 YMCA 건물 5층을 빌려서 조직을 꾸린 이들은 KIST가 완공된 후 홍릉으로 옮겼다. 이후 CDC-3300이란 집채 만한 컴퓨터가 KIST에 들어왔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컴퓨터 앞에서 사람들이 펀치카드를 들고 줄을 서서 작업을 했다. 작업 결과는 라인프린터에 찍혀 나왔다.

독학으로 포트란과 코볼을 습득해 전문가가 된 안 교수는 성 박사와 함께 프로그래밍 교육에도 힘썼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려면 사람을 늘리는 게 출발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일반인에게 프로그래밍 교육을 해서 1만명 넘는 인력을 배출했다. 1970년께는 강경식 당시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을 설득해서 컴퓨터로 예산처리를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우리 정부가 컴퓨터를 활용한 최초 시도다.

예산담당 공무원이 광화문에서 방대한 예산편성 자료를 지프차에 싣고 KIST로 가져와 키 펀칭을 한 후 처리결과를 프린트해서 가져가는 일을 반복하다 나중엔 광화문 경제기획원 한켠에 터미널실을 만들고 KIST와 전화선으로 연결했다. 광화문과 홍릉을 오갈 필요 없이 광화문에서 홍릉의 컴퓨터를 쓰면서 입력과 출력을 했다.

안 교수는 "굉장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데이터통신망이었다. 전화선으로 연결했는데 당시에는 목소리도 잡음 때문에 제대로 안들렸다. 모든 사람이 안된다고 했다"고 했다.

성 박사와 안 교수는 밀어붙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개통 테이프커팅 행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후 다른 정부부처들도 하나하나 터미널을 설치하고 마치 송유관으로 석유를 가져오듯 KIST 메인프레임을 끌어다 썼다.

미 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하와이대로 유학을 가 컴퓨터과학 석사와 자원경제학 박사를 받은 안 교수는 1977년 귀국 후 예산국장이 돼 있는 강경식 국장과 또 한번 의기투합했다. 기업과 국민들이 해당 관청을 안 가도 주민등록등본과 호적등본 등을 발급받을 수 있게 하자고 아이디어를 모았다. 1978년 충청북도 내 모든 군청과 음성군 면사무소에 컴퓨터를 설치했다.

"1970년대 말에 DX(디지털혁신)가 일어난 거죠. 도청에서 음성지역 주민의 주민등록등본을 인쇄해 도장까지 찍었는데 보는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지요."

그러나 민원서류의 대장을 갖고 있는 관서의 장만 주민등록이나 호적을 발급할 수 있게 한 법이 발목을 잡았다. 기술적으로 해냈지만 확산이 안됐다.

막힌 게 풀린 것은 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가 전자정부 11대 과제를 하면서다. 고려대 교수로 있던 안 교수는 전자정부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 정부의 일하는 방법과 국민들에 서비스하는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사업들을 밀어붙였다.

그는 공무원들을 다그쳤다. 사무실도 없는 전자정부특위는 이곳저곳 회의실을 빌려서 회의를 했다.

"2001년 겨울, 어느 하루는 눈이 엄청 왔는데, 오늘은 회의 안 하죠라는 연락이 왔어요. 대뜸 우리는 특공대야. 특공대가 눈 온 다고 회의 안하느냐. 회의 하러 오라고 했어요."

11개 거대 프로젝트를 2001년 1월부터 시작해 마스터플랜 수립, 업무재설계를 거쳐 시스템 구축까지 해서 2002년 상반기에 가동시켰다. 모든 사람들이 최소 2년 이상 걸린다고 하는 일이었다.

"2002년 10월에 청와대에서 준공식이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내 일생에 정치가로서 좋은 날이 별로 없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라고 하며 눈물을 글썽이시더군요."

안 교수는 그 공로로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후 노무현 정부 31대 전자정부 프로젝트까지 지휘했다. UN은 우리나라 전자정부에 6년 연속 세계 1등 순위를 줬다.

안 교수는 "전자정부는 한마디로 종합예술이다. 기술과 의지가 다 합쳐져야 한다. 공무원들이 미적대면 대통령한테 직보하겠다고 협박했다. 욕 먹으면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후에도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에 이르기까지 대통령들의 지근 거리에서 행정전산화부터 전자정부, 디지털플랫폼정부의 설계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다.

"운이 좋았다. 스승부터 동료, 후배까지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안 교수는 "특히 어느 누구와 견줘도 대통령 복 하나는 타고난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 교수는 1960년대 국내 컴퓨터 여명기부터 완성기까지 역사와 스토리를 꿰뚫고 있으면서 국가 전략과 사업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정부 후반에는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당시 뜨거운 이슈였던 IPTV 허가 문제를 풀었다.

안 교수는 "엄청나게 힘들었는데 결국은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덕수 총리에게 보고하러 갔더니 '기적을 이루셨다'고 했다. 위원장 중 가장 힘든 위원회였다"고 말했다. 2017년에는 한국 전자정부 50년을 맞아 50년사 편찬위원장과 전자정부추진위원장을 함께 맡았다. 그해 전자정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전 정부와 현 정부가 칼로 자르듯 나뉘는 시대에 9개 정권을 거치며 활동한 비결을 묻자 "자리 욕심을 안 내서인 것 같다. 장관, 부총리 제의가 와도 안 하겠다고 하니 공무원들이 같이 일하려 하더라. 위원장이 자리를 욕심 내면 위원회가 망가진다. 내 스탠스를 잘 지켰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정부에서는 진짜 끝나려나 보다 했는데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자문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더라"고 전했다.

안 교수는 전자정부가 디지털플랫폼정부로 진화하는 지금을 변곡점이라고 짚었다. 그는 "전자정부의 핵심은 생산성 혁신이다. 국민 1인당 생산성을 10배로 올리면 5000만 인구가 5억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면 13억 인구의 중국, 1억4000만 인구의 일본 사이에 낀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들에 흡수되지 않고 자립해 살 수 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전자정부다. 전자정부는 '머스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AI(인공지능)와 빅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는 나라는 선진국이, 저항하는 국가는 패배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기술에 겁먹을 필요가 하나도 없다. 제대로 활용하면 된다. 정부와 기업이 할 일은 좋은 데이터를 만들어서 넣는 것이다. 주저해선 안 된다"는 안 교수는 "다만 개인정보를 다루는 정부와 기업이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는 조직을 두고, AI를 활용해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는 등 기술을 남용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기구를 둘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부동산 같은 복잡한 정부정책의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데이터와 디지털 트윈 기술로 미리 시뮬레이션을 해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시도도 필요하다"면서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AI는 깜짝 놀랄 만한 기술이고 굉장한 사건이지만, 그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줄이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인간의 집단지성으로 해내야 한다"고 했다.

매일 아침 5개 신문을 보며 하루를 열고 유튜브, 스탠퍼드대, 코세라 등에서 AI 강의를 듣는다는 안 교수는 "기술이 바뀌어도 세상은 저절로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는 새로운 기술과 수요가 뿌리내리도록 바탕을 만들어주고, 기업은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세상에서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신바람 나서 변화를 시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2년 지나면 낡은 지식이 되니 도리 없이 평생 공부해야 해요. 1~2년만 공부 안하면 영원히 낙오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결국 승자는 잘 노는 사람이 될 거예요. 우리는 워커홀릭 시대를 살았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으니까요." 글·사진=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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