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이재명의 더러운 평화
6년 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의 잔상이 꽤 오랫동안 남았었다. 내용 자체는 평이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던 '삼전도 굴욕'을 다룬 것이어서다. 그런데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건 청과 화친해 나라를 지키자는 주화파(主和派)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斥和派)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긴장감 넘치는 대치 연기가 너무 실감났기 때문이었다. 인조는 주화파 편에 섰고 '더러운 평화'의 대가는 컸다. 수많은 젊은 여성 등 민초들이 인질로 끌려갔고 조선은 청의 조공국으로 전락했다.
1938년 영국 내각도 나치 독일에 맞설지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치열한 토론 끝에 주전론자 윈스턴 처칠은 뒷전으로 밀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던 주화파 네빌 체임벌린 총리에게 힘이 실렸다. 그는 그해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나 체코 영토 일부를 넘겨준 뒤 '명예로운 평화'를 얻었다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1년 뒤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유럽은 초토화됐다. 이처럼 악랄한 불량국가의 선의에 기댄 더러운 평화는 가짜평화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지난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이재명이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고 한 발언이 혹세무민 궤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강대국 러시아에 맞선 젤렌스키는 대역죄인인가. 영웅적인 결사항전에 나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비정상이라는 건가. 그냥 주권을 넘겨주고 더러운 평화를 선택했어야 했나. 석 달 전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나 가입 예정인 스웨덴도 러시아 심기를 건드렸으니 큰 실수를 한 건가. 그의 답변이 궁금하다.
무엇보다 그의 '더러운 평화' 안보관은 위험하다. 김정은 정권의 모험주의적 군사책동을 부추길 소지가 커서다. 평화 구걸로는 나라도 국민도 지킬 수 없다. 압도적 힘의 우위를 통해 도발할 엄두조차 못 내게 만드는 게 '깨끗한 평화'다. 이런 깨끗한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자꾸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택한 '더러운' 길로 가자고 한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박봉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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