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10년의 인고’, 대한민국 저력 보여주다
HBM 글로벌 시장 90% 장악…OLED 프리미엄 TV 신시장 열어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한국 기업들 참 장합니다. 기업의 힘이 곧 국력인 시대인데 좀 더 자화자찬을 해도 되지 않나요.”
최근 만난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에 대한 칭찬을 좀 당당하게 해도 되지 않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글로벌 경제 패권 다툼 속에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함의 포격에 긴장하고 후발국들의 추격을 막아서야 하는 한국의 처지가 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이 긴박하고 긴장되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분야에서 특히 그렇다. 이 세 분야는 현 시대의 첨단 산업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자, 첨예한 글로벌 공급망 싸움에서 국가들이라면 누구든 탐내는 ‘비장의 무기’다.
한국 기업들은 위 기술을 위해 무려 10년 전부터 척박한 신시장을 개척했고, 최근 유의미한 성과를 잇따라 내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과감하게 진행한 투자가 차세대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다는 반응도 업계에서 꾸준히 나온다.
반도체 분야에선 최근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 돌풍이 눈에 띈다. 지난 2013년 SK하이닉스는 이 제품을 미국의 AMD과 힘을 합쳐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SK그룹에 편입된 지 불과 1년 만에, 재무구조가 양호하지 못하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기술 투자에 대한 열의를 손에서 놓지 않은 결과다.
지난 12일엔 회사 설명회(IR)를 따로 열었다고 한다. 기존 IR 행사처럼 실적 가이던스나 경영 전략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HBM 기술 설명에 초점을 뒀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그만큼 이 제품에 대한 업계 반응이 뜨겁다는 설명이다.
물론 인공지능(AI) 시장을 이끄는 시총 1조 달러(약 1300조원)의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업 엔비디아의 덕이 크다. 그러나 누가 10년 전 이렇게 ‘대역폭이 넓으면서 용량이 큰 제품’이 환대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업계 사람들 말대로 ‘AI 시대에 필요한 균형잡힌 메모리 칩’을 누가 그때 떠올릴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고위 경영진이 “HBM 시장에서 삼성이 SK하이닉스보다 점유율이 높다”고 직원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SK하이닉스를 의식한 발언으로 업계는 평가한다.
그런데 두 기업은 치열한 경쟁 관계지만, 한데 모아보면 세계 HBM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한 자랑스런 한국 기업들이다. HBM 시장에 대한 두 기업의 옥신각신은 오히려 ‘유쾌한 신경전’에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이 지금과 같이 자리잡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이 기념비적 신시장 개척 역시 2013년으로 연원이 올라간다. LG디스플레이의 OLED 패널 공급과 LG전자의 올레드 TV 개척 역사 역시 ‘인고의 세월’이 담긴 성과라는 분석이다.
LG디스플레이는 당시 세계 최초로 55인치 OLED TV 패널 양산에 성공했다. 막대한 설비 투자 비용에 따른 감가상각 압박은 회사 재무에 다소 부담을 주고 있지만, ‘대형 OLED 글로벌 리더’ 자리를 꿰찼다는 점에서 이 시도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는 분석이다. 최근에는 27인치에서부터 가장 큰 97인치까지 중형과 초대형을 아우르며 글로벌 고객사들을 확대하고 있다.
LG전자 역시 올레드 TV 시장을 확대하며 새로운 프리미엄 시장을 열었다. 1500달러 이상 프리미엄 TV 시장에서 OLED의 점유율(매출 기준)은 2027년에는 68.7%로 증가할 전망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LG디스플레이의 패널을 단 OLED TV를 처음으로 출시한다. 세계 1위 TV 기업인 삼성까지 LG와 손을 잡으면서 중국 기업이 장악한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시장에 대한 견제 가능성도 커졌다.
배터리 시장에선 삼성SDI의 저력이 주목된다. 이 회사는 2013년 한 배터리 전시회에서 IT 기기용 전고체 배터리를 최초로 공개한 바 있다. 이후 기술 개발을 지속한 결과 삼성SDI 수원 연구소 내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라인 ‘S라인’이 이달부터 가동해 샘플 생산에 돌입한다고 한다. 국내 최초의 배터리 파일럿 라인이다. 회사 측은 전고체 배터리 시제품을 하반기에 내놓을 예정이다.
전고체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한 배터리다. 현재 주류인 리튬이온 배터리와 비교해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고 화재 위험성이 낮아 ‘꿈의 배터리’로 불린다. 삼성SDI는 2027년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를 목표하고 있다. 일본 완성차 업체 토요타가 2027년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하는 등 일본 기업과의 경쟁이 치열하지만, 삼성SDI의 해당 시장 선점 기대감이 크다.
10년간 한국은 정권이 2번 바뀌었다. 10년 전 한국 IT시장을 뒤흔든 건 아이폰을 필두로 한 스마트폰 시장의 부상이었다. 그 혼란과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HBM(반도체), 대형 OLED(디스플레이), 전고체(배터리) 등에 과감하게 투자한 한국 기업들의 선견지명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10년 뒤 사람들은 어떤 IT·전자 제품에 열광하고 있을까. 그때 글로벌 공급망 패권을 뒤집는 기술을 무엇일까. 이 답은 오늘 새롭게 도전하는 한국의 기업들에게 있을 것이란 게 재계 중론이다. 정부의 기업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은 절대 틀린 해결책이 아니다. 경제가 ‘안보’인 지금은 더욱,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ra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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