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9. 과천 추사박물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와 ‘추사체’로 불리는 독특한 글씨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추사가 생의 마지막을 과천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추사박물관(관장 신동선)이 자리 잡은 과천시 추사로 78(주암동)은 아버지 김노경이 1824년 조성한 과지초당(瓜地草堂)이 있던 곳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추사와 과천과의 특별한 인연은 1837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면서 더욱 깊어진다.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 8월부터 생을 마감하는 1856년 10월10일까지 만 4년을 과천에서 살면서 학문과 예술을 꽃피운다.
■ 과천에서 꽃피운 추사와 후지츠카 부자와의 아름다운 인연
과천시는 1996년 ‘과천 추사 관련 유적 조사 보고서’ 발간을 시작으로 추사 김정희를 조명하는 여러 가지 사업을 활발히 벌인다.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가 수집한 방대한 추사 관련 자료를 그의 아들 아키나오(明直, 1912~2006) 선생이 과천시에 기증한 2006년부터 박물관 건립 논의가 본격화된다. 마침내 2013년 6월3일, 추사의 생신일에 맞춰 추사박물관을 개관한다. ‘추사가 보낸 편지전’, ‘추사묵연전’, ‘추사 글씨 현판전’, ‘다산과 추사 전’, ‘정벽 유최관 전’, ‘자하 신위 전’, ‘추사금석 전’, ‘추사가문의 글씨 전’, ‘추사서화파 전’, ‘추사의 성북동 나들이 전’, ‘추사중국전: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 ‘추사가 사랑한 꽃 전’, ‘추사한국전: 추사의 과천시절 전’, ‘소지도인 강창원 전’, ‘추사필담첩1: 1822년 김노경의 연행 전’, ‘다시, 봄: 추사 김정희의 일생과 실학자의 활동’, ‘추사필담첩2: 1809년 추사의 연행 전’을 거쳐 현재 진행 중인 ‘후지츠카 치카시와 난학’으로 이어진다.
“추사박물관의 최상위목표는 추사 문집의 정본화 사업입니다.” 추사박물관을 준비할 때부터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는 허홍범 학예연구사는 추사박물관이 추구하는 것이 추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바탕이 되는 문집의 정본화 사업임을 강조한다.
■ 고난에서 피워낸 추사의 학문과 예술
2층 상설전시실은 추사의 생애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추사가 8세 때 아버지에게 올린 편지를 살펴본다. “장마와 무더위에 건강은 어떠신지요?”라는 안부로 시작하는 맏아들의 편지와 “편지를 받고 보니, 어른을 모시고 글 공부하면서 두루 평안하고, 근래의 돌림병도 우선 면했다니 무척 위로가 되는구나”라는 생부 김노경의 답신이 한 장에 들어있다.
추사가 애용한 인장도 눈길을 끈다. ‘추사’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완당’을 비롯해 36마리의 백구가 날아드는 초당을 뜻하는 ‘삼십육구초당’처럼 재미있는 내용을 새긴 인장도 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발견기’에서 금석학으로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혀간 김정희의 열정을 발견한다. 아우 명희와 상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생 형제들과 돈독한 우의를 나눈 추사의 따뜻한 얼굴이 그려진다. 소치 허련이 제주도에서 유배를 살고 있는 스승을 생각하며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과 이한철이 그린 ‘추사영정’을 통해 추사는 외모가 수려한 미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부인 예안이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드는 매력적인 유물이다. 한글인 데다 그 내용이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건강 걱정, 자손 교육에 대한 고민 같은 추사의 인간적 면모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묵란도’를 비롯한 익숙한 난초 그림도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박물관 외벽을 장식한 ‘불이선란도’를 찬찬히 살펴본다. 추사체의 깊은 맛을 느끼려면 반드시 오래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의 유물도 있다. 청나라의 유명한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상’과 ‘월매도’는 후지츠카 치카시의 저서 ‘청조문화 동전(東傳)의 연구’에도 실려있다. 끝까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려준 그림 ‘세한도’에 얽힌 사연은 감동적이다. 이상적 사후에 민씨 일가로 넘어간 세한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후지츠카 치카시의 손에 들어간다. 서예가 손재형이 ‘세한도’를 소장한 후지츠카의 집을 여러 차례 찾아가 양도해 줄 것을 간청해 끝내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후지츠카가 사용한 인장이 여러 점의 인장에서 한국인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인장을 발견한다. 유물에서 추사와 후지츠카와의 인연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개관 10주년을 맞아 지난달 3일부터 시작된 특별기획전 ‘후지츠카와 난학(蘭學)’은 추사박물관 10년의 내공이 응축된 전시다. 다음달 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특별전은 후지츠카 기증유물을 중심으로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의 난학과 후지츠카 가문 자료, 후지츠카 치카시의 생애와 학문을 두루 살필 수 있다. 일본 학자가 추사의 무엇에 매료됐을까? “좀 생소하겠지만 ‘난학’은 일본 에도시대에 주로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된 서양의 의학과 과학 지식을 연구한 학문을 말합니다. 후지츠카 가문은 난학의 세례를 통해 신학, 의학, 금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성취를 이룩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후지츠카가 김정희를 발견했던 것이고, 추사를 연구하여 1936년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것이지요.”
“일본 실학인 난학이 일본을 근대로 이끌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난학에 바탕을 둔 일본의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은 번역으로 이어졌고, 일본이 근대화를 이룩하는 학문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지요.”
특별전을 알리는 포스터에 ‘화란문전자류’라는 사전이 실려있다. 17세기 시작된 난학의 전통은 유럽의 서적을 번역하는 열풍으로 이어져 마침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다. 반식민지가 된 중국과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후지츠카 치카시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추사에 빠져드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주목된다. 아버지 후지츠카를 따라 한국에 와서 5년 생활한 아들 아키나오도 한학자인데, 추사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한 장본인이다.
■ 지나온 10년, 앞으로 열어갈 100년
추사박물관은 서울시교육청 지정의 청렴 유적지이기도 하다. 추사박물관은 수준 높은 번역서와 논문집도 꾸준히 발간해 추사학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역주 추사 암행어사 보고서’(2014), ‘역주 추사 친필 동몽선습’(2015), ‘탈초·역주 추사필담첩’(2021~2), 김정희, 김노경, 김명희, 박제가, 유득공 등의 ‘추사필담첩’은 주목되는 성과물이다. 특히 ‘추사필담첩’은 박제가와 유득공의 필담, 김정희 연행 필담, 아버지 김노경과 동생 김명희의 연행 필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추사학 연구의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이 필담첩에서 김정희가 “제 이름은 정희이며 자(字)는 추사(秋史), 호는 보담재입니다. 지난해 시월(10월) 진사가 됐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기록이 발견됐다. 김정희의 호로 알려진 ‘추사’는 본래 자(字)로 쓰였는데 점차 별호로 쓰였다고 평가된다.
추사 김정희를 쉽게 널리 전달하기 위한 추사박물관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추사 김정희’를 제작하고 ‘스마트 추사박물관’을 구축해 추사를 알리는 데 활용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2017년에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진로체험기관’으로 인증을 받았고, 올해 1월에는 ‘2022년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제 우수인증기관’에 선정됐다. 3회 연속 우수인증기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새로운 유물을 발굴해 소개하는 수준 높은 학술회의와 콘텐츠 개발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과지초당을 찾아 “70년 동안 붓 천 자루와 벼루 열 개를 다 닳게 했습니다”라고 고백한 추사의 말을 떠올린다. 절망의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추사의 의연하고 투철한 자세가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이정민 기자 jmpuhaha@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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