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가족의 울분, 예술의 탄생…'비밀의 언덕'

손정빈 기자 2023. 7. 13. 07: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최근 수 년 간 한국영화계가 일궈낸 성취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윤가은·김보라·윤단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여성 감독이고, 이들의 영화가 미성년 여성 캐릭터를 내세웠으며,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단번에 주목받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느 한 시절의 마음을 골똘히 응시하고 그때 그 시절의 관계들을 재검토하며 관객의 현재를 어루만진다는 것도 닮았다. 이제 이 리스트에 이름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한다. 영화 '비밀의 언덕'(7월12일 공개)의 이지은 감독이다. 이번 여름에 쏟아져 나올 예정인 온갖 크고 화려한 영화들과 비교하면 '비밀의 언덕'은 어쩐지 왜소해 보이지만 이 작은 영화에는 덩치로 표현되지 않는 저력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이명은(문승아)이 부모 반대에 맞서 학급 반장이 되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가족에 관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얼개만 보면 언뜻 '우리들'(윤가은) '벌새'(김보라) '남매의 여름밤'(윤단비) 등과 어떤 면에서든 닮아 있을 거로 추측된다. 그러나 '비밀의 언덕'은 이런 선입견이 쓸데 없는 걱정에 불과하다는 듯 앞선 세 편의 영화가 다루지 않은 주제를 파고들어 반추와 성찰을 유도한다.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먼저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한 때(혹은 지금도) 가족이 그 누구보다 싫었다. 그 다음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영화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가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96년을 배경으로 초등학생 주인공을 내세웠으나 '비밀의 언덕'은 관객의 추억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써내려가는 이야기는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명은이는 말한다. 왜 우리 엄마·아빠는 이렇게도 교양이 없을까. 왜 이렇게 막 사는 걸까. 왜 다른 부모처럼 평범하지 않을까. 명은이처럼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 가족은 예나 지금이나 때론 버겁고 때론 짜증나며 때론 한심하다. '비밀의 언덕'은 가정환경조사라는 명목으로 무례한 질문을 대놓고 던지며 비교와 평가를 유발했던 시절을 가져와 가족이라는 선택 불가능한 관계를 주시한다. 그리고 이때 명은이의 언행은 불일치한다. 이 아이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기어코 가족을 향해 달려간다.


만약 '비밀의 언덕'이 여기서 머물렀다면 적당히 보기 좋은 가족성장영화에 그쳤겠지만, 이 작품은 명은의 고충을 창작에 관한 서사로 가지쳐 나가며 한 단계 도약한다. 영화는 명은이와 혜진이 두 아이의 글쓰기 방식을 대조해가며 어떤 게 더 좋은 글인지 묻는다. 계획 대 즉흥, 연구 대 본능, 거짓 대 사실. 명은과 혜진은 글쓰기를 통해 고달픈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과 동시에 그 세상 안에서 인정 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목표에 도달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비밀의 언덕'은 일단 둘 중 한 가지 방식의 글쓰기가 더 높은 성과를 내게끔 하며 한 쪽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장단이 있다는 걸 명확히 하며 최종 판단을 유보한다. 결정적으로 명은이는 두 가지 창작 방식을 모두 경험하며 자기도 모르게 삶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간다.


이지은 감독은 철저히 계산된 구조 안에서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큰 줄기로 합류시키는 연출력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비밀의 언덕'은 명은과 혜진을 대비하는 것과 함께 명은과 명은의 오빠를 비교하기도 한다. 엄마와 아빠를, 엄마와 친구의 엄마를, 엄마와 외할아버지를, 아빠와 친구 아빠를, 아빠와 외삼촌의 차이를 일일이 짚고 넘어간다. 명은의 가족과 명은 외할아버지네 가족, 명은의 가족과 명은 친구네 가족 그리고 혜진이네 가족까지 각기 다른 가족 형태를 직·간접적으로 병렬하며 명은이의 고민을 보편으로 확장한다. '비밀의 언덕'은 언뜻 도식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같은 구도들을 명은이의 일상과 각 캐릭터 대사 속에 눈에 띄지 않게 담아낼 정도로 섬세하기도 하다.


이처럼 가족과 예술을 오가며 전진하는 '비밀의 언덕'이 하려는 일은 결국 위로다. 명은이는 자신이 쓴 가장 솔직한 글을 산에 묻는다. 완전히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가슴 속에 담아뒀기에 이 아이는 앞으로도 반복해서 가족에게 상처 받고 가족에게 상처 줄 것이다. '비밀의 언덕'이 자기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 보이는 혜진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꾸만 거짓말 하고 비밀을 만드는 명은이의 이야기인 건 우리가 대개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살고 있어서다. '비밀의 언덕'은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도 당신과 똑같은 마음이라고, 집에서 뛰쳐 나와버리는 명은이의 울분으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명은이의 화해로 말한다.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Copyright ©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