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가 택한 연극 '나무 위의 군대'…웃음 뒤 찾아오는 씁쓸함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전쟁은 2년 전에 끝났습니다. 어서 거기서 나오세요."
지난달 20일 개막해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 중인 연극 '나무 위의 군대'는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 4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오키나와에서 일본의 패전 사실을 모른 채 약 2년 동안 나무 위에 숨어 살았던 두 병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2013년 일본에서 초연됐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로 스타 반열에 올라 '카지노', '범죄도시2' 등으로 최근 최고 주가를 달리는 배우 손석구가 차기작으로 연극을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티켓도 일찌감치 매진돼 공연 기간을 8월 12일까지 일주일가량 늘렸다.
무대에는 극의 해설자이자 나무의 정령으로 '여자'가 등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관'과 '신병'의 2인극이다.
상관과 신병은 포화가 쏟아지는 전쟁에 내던져진 군인이라는 동일한 신분이지만 지위와 전쟁을 대하는 입장은 다르다. 상관은 전쟁 경험이 풍부한 본토 출신의 군인이고, 신병은 나고 자란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전쟁에 뛰어든 소년병이다.
상관은 나무 위에 숨어든 것은 적군을 감시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하며 대의명분을 중시한다. 적군의 식량으로 배를 채우자는 신병의 제안에도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고, 전쟁이 끝났다는 편지를 발견한 뒤에도 이 편지는 적군의 속임수라고 현실을 부정하며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한다.
반면 신병은 적군의 총성을 두려워하며 상관을 믿고 의지한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다른 병사에게 나무로 올라오라고 소리치다 상관에게 크게 혼이 나기도 하고, 나무 위 생활 중간중간 내려가 싸워야 하지 않느냐고 답답해하기도 한다. 상관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만, 점점 의문이 쌓이면서 결국 폭발하고 만다.
전쟁에 임하는 두 사람의 다른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 역사와 전쟁 당시 군인들이 주입받았던 국가주의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국'이라는 독립 국가였지만, 메이지 유신 때 오키나와현으로 병합됐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랜 시간 '2등 국민'으로 일본 본토 국민과 비교되며 차별을 받아왔다. 또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인에게는 살아서 포로의 수치를 당하지 말고 군인으로서 깨끗한 최후를 맞이하라는 행동규범 '전진훈(戰陣訓)'이 요구됐다.
본토 출신인 상관에게 오키나와를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는 이 섬에 가족과 친구를 두고 있는 신병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국가의 대의(大義)를 위해 개인의 목숨은 희생당해도 마땅하다는 믿음을 가진 인물이다. '살고 싶다'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이 잘못된 믿음은 상관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이런 상관에게 자꾸만 나무에 숨어 있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를 묻는 신병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스스로 틀린 답을 정답이라고 억지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신병이 그런 자기 말을 맹신하니 불편한 것이다.
신병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역시 상관이 옳다고 믿다 보니 자신의 본심과 다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생전 처음 겪는 전쟁의 참혹함에 짓눌려 상관의 판단을 무작정 믿고 따르면서도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의문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친구의 죽음, 점점 커지는 적군의 주둔지를 애써 무시하고 나무 위에 남아있는 것이 맞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 괴롭다.
다만 극에는 전쟁에 관한 배경지식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다 보니 자칫 상관이 어깃장을 부리는 '꼰대'로만 비치기도 한다. 극의 무게감을 덜어내기 위해 두 사람의 갈등 장면을 웃긴 장면으로 소화하면서 인물의 내면 심리가 치밀하게 드러나지 않는 측면도 있다. 물론 믿음에서 비롯된 비극은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회사 등 일상에서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전쟁을 소재로 했지만, 극 중간중간 웃음 코드가 숨겨져 있어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벼운 편이다. 이는 원작의 특징이지만, 태평양 전쟁을 직접 겪은 일본 관객과 한국 관객 사이에는 작품이 주는 무게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웃음 코드가 다소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웃으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이 야기한 비극, 그 속에서 휘청이는 인간의 연약함, 아이러니한 결론을 목격하게 돼 씁쓸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게 된다.
ae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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