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투자 붐에 올라타라”… 소부장 600곳 미국 러시
美 반도체 소재·장비展 역대급 성황
11일(현지 시각)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 웨스트 2023′이 열린 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모스콘 센터 사우스홀. 세계 5위 반도체 장비 업체 미국 KLA 부스에는 주력 제품 ‘나노 인덴터’를 구경하는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는 고온·고습 등 다양한 환경에서 반도체 표면을 측정해 고장 여부를 검사하는 장비다. 현장에서 만난 브라이언 크로포드 KLA 제품 마케팅 관리자는 “지금까지 미국에선 대학 연구실이 주고객이었지만, 현지에 반도체 생산 라인이 신설되면서 기업 고객이 빠르게 늘고 있다”며 “올해 미국 시장에서만 매출이 20%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과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에 넘겨줬던 ‘반도체 제조 왕국’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미국의 야망이 현실화되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주도로 대규모 지원금과 세제 혜택을 내건 ‘칩스 포 아메리카(미국을 위한 반도체)’ 프로그램이 효과를 거두면서 ‘리쇼어링(회귀)’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박람회에는 일본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 도쿄 일렉트론, 반도체 진공 시스템 분야 주요 기업인 독일 파이퍼 배큠 등 반도체 생태계 핵심 업체들이 대거 모였다. 반도체 웨이퍼를 깎는 화학약품 제조사부터 완성품을 자율주행 로봇으로 옮기는 기술 기업까지 반도체 제조 전 공정을 아우르는 기업들이 총출동했다. 행사를 주최한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아메리카의 조 스토쿠나스 회장은 “행사 부스가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려 나갔다”며 “미국에 반도체 공장 건설 열풍이 불며 현지 관계자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제품을 판매하려는 회사들이 몰려든 결과”라고 했다.
◇장비 업체들, “리쇼어링에 매출 쑥”
전 세계 3대 엔지니어링 회사로 꼽히는 스위스 ABB그룹 부스에는 이 회사가 출시한 로봇팔 ‘고파(GoFA)’가 관람객과 체스를 두고 있었다. 관람객이 체스 말을 움직이면, 다음 수를 고민하듯 2~3초 정지했다가 섬세하게 목제 체스 말을 집어 옮겼다. 반도체 박람회에 정교한 체스를 둔 것은, 0.02㎜의 편차 내에서 정밀 작동해 공정 중 손상되기 쉬운 반도체 제품을 이동시키는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넬슨 장 ABB 글로벌 제품 관리자는 “최근 텍사스 등 반도체 시설 공사가 이뤄지는 곳으로 납품 규모가 늘어나고 있어 회사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대만 반도체 장비 업체 관계자는 “반도체 생산 라인이 몇 없는 미국은 원래 장비 업체에 중요한 시장이 아니었고, 세미콘 웨스트도 아시아에서 열리는 자매 행사들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고 했다. 이 회사는 미·중 반도체 갈등으로 중국 사업을 철수하느라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30~40% 줄었지만, 미국에서 새로 생겨난 매출 덕분에 올해는 다시 예년 수준 매출을 회복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뉴욕주 경제 개발 위원회도 부스를 차리고 “뉴욕에서 반도체 사업을 하라”고 홍보했다. 뉴욕주는 글로벌파운드리스, 울프스피드 등 미국 선두 반도체 기업들이 공장을 운영 중인 곳으로, 최근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이 뉴욕주 보조금 55억달러를 받고 신규 생산 라인 건설지로 낙점하기도 했다. 현지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연방정부 외에 주별로도 반도체 보조금이 따로 있다”며 “텍사스, 뉴욕 등이 경쟁적으로 기업을 유치하면서 분위기를 더 뜨겁게 달구고 있다”고 했다.
◇미국 “아무리 작은 기업이라도 와라”
전문가들은 “미국 반도체 지원 프로그램이 이제 2단계에 진입했다”고 평가한다. 초반에는 삼성전자·TSMC 등 대기업의 대형 제조 시설을 미국으로 유치하는 것에 몰두했다면, 이제는 반도체 산업을 지탱하는 풀뿌리 기업들까지 유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조만간 3억달러(약 3900억원) 이하 소규모 투자에 대한 반도체 지원금 정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에 지원하는 것과 똑같이 투자금의 5~15%를 지원한다. 리넬 매케이 미 상무부 칩스 프로그램 오피스 국장은 “미국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의 핵심은 아무리 작은 투자라도 내용이 알차면 지원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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