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위로는 노크다
“힘들었겠다.” 이 말을 듣는데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난 적이 있다. 단순히 내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어서는 아닐 것이다. “괜찮을 거야”나 “나아질 거야”처럼 무책임한 낙관과 동떨어진 말이어서도 아닐 것이다.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듯,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때 내게 필요했던 말이 바로 저것이었다. “힘들었겠다.” 힘듦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처지가 달라지지도 않고 심신을 짓누르는 하중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저 말이 고팠을까. 어째서 속절없이 눈물을 쏟아냈을까.
해가 갈수록 취약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개인적인 문제에 사회적인 문제가 틈입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문제에 과도하게 몰입하기도 한다. 사회적 재난이 개인적 불행의 탈을 쓸 때마다 일부러 도리질을 친다. 지나친 감정이입은 사태의 본질을 흐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마음이 앞서고 만다. 조목조목 비판하는 대신 남몰래 훌쩍이고, 대안을 찾는 대신 분노를 잠재우지 못해 안달복달한다.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훔치고 뒤돌아 심호흡할수록, 심신은 토대를 다지고 보수(補修)한다고 해서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다.
그럴 때면 으레 책으로 기어들어 간다. ‘기어들다’의 세 번째 뜻은 “다가들거나 파고들다”인데, 책을 읽을 때마다 따뜻한 이불 속이나 누군가의 품 안에 깃드는 상상을 한다. 그날 내가 집어든 책은 김상혁의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3)였다. 시집을 펼치며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위로’였다. 시집의 제목은 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혼잣말 같기도 하고, 큰일이 와도 우리 둘이라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다짐으로도 읽혔다.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강해져야 한다고 쏘아붙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무관심을 무기로 혼자 이곳을 벗어나려 한다. ‘하기’와 ‘하지 않기’ 사이에서, 독서는 아무 대가 없이 내게 말 걸어주고 묵묵히 내 생각을 들어준다. ‘아, 이 사람도 힘들어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은 “힘들었겠다”라는 말처럼 뭉근하게 나를 달래준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라는 발견은 다들 척척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세상에서 적잖이 위안이 된다.
책에 실린 시 ‘노크’에서 “사람 정말 싫다”라고 말하는 화자에게 “나의 다정한 사람”은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손잡아준다”. “세상 정말 싫다”라고 말하는 화자를 바라보며 예의 그 사람은 “강아지에게 가슴줄 걸고 산책을 준비한다”. “우글거리는 마음을 몇개 밟으면서” 산책을 마칠 즈음, 옆에 있던 다정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도 세상 사람이 싫어.” ‘세상’과 ‘사람’이 ‘세상 사람’이 되는 동안, 상대와 맞잡았던 손은 “주머니에 담겨 똑똑 눈물”을 흘린다.
이 시에서 손이 하는 일은 잡아주는 일인데, 어째서 제목이 노크일까. 손가락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인기척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주머니 안의 일을 화자가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싫음’을 고백했을 때, 그것을 들어주고 같이 걷겠다고 가만히 손잡는 일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노크다. 우리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할 수 있고, 그 말을 귀가 아닌 눈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 사람이라는 문을 계속 두드리고 책뚜껑이라는 문을 열 수밖에 없다.
위로에도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노크 소리에 가까울 것이다. 실례하지 않으려고 상대에게 나의 존재를 나직이 증명하는 것이 노크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나도 여기 있어요”라고 응답하는 행위에서 말없이 온기를 전하는 사람의 모습을 본다. 곁에 그런 사람이 있는 한, 우리 둘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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