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서툰 영유아들, 사교육 스트레스 부모에게 말도 못 해”
김지현 인천교사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맹진아 서울시교육청 유아교육진흥원장
김대욱 경상국립대 유아교육과 교수… 정지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동아일보가 영유아 사교육 실태를 취재하며 만난 영유아 부모들은 하나같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사교육을 시킨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아 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에 들어가려 4세 때부터 레벨테스트를 받고, 합격 후에는 밤늦게까지 숙제를 하는 아이들의 ‘현재’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달 26일 발표한 사교육 대책에서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영유아 시설의 공교육을 강화하고, 영어유치원 편법 운영을 근절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런 대책이 ‘학부모 수요’만 고려했을 뿐, 아이의 ‘행복권’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11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김대욱 경상국립대 유아교육과 교수, 김지현 인천교사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인천 능내초 병설유치원 교사), 맹진아 서울시교육청 유아교육진흥원장, 정지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와 함께 영유아 사교육 의존을 낮추기 위한 방안을 짚어봤다.
―최근 설문조사에서 취학 전 6세 아동의 88%가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에서 느끼는 사교육 과열의 원인은 무엇일까.
▽정 공동대표=아이의 발달 단계에 따라 어떤 교육과 돌봄이 필요하고 중요한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 결국 ‘내 아이만 사교육을 안 받으면 뒤처질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학원을 찾게 된다. 사교육 효과에 관한 선행 연구 등 부모를 안심시킬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정부가 줘야 한다.
▽김 부위원장=부모의 불안감을 아이도 느낀다. 내가 모르는 한글이나 숫자를 옆의 친구가 더 많이 알면 아이들도 경쟁을 의식한다. 아이들의 사고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느껴진다.
▽맹 원장=정부의 유아교육 과정이 부모들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내면서도 ‘무슨 교육을 받나’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것 같다. ‘놀고만 오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사교육 효과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김 교수=많은 부모가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낫다’고 믿는다. 영유아 사교육 효과를 명확하게 수치화하긴 어렵다. 하지만 영어 단어나 문장을 조금 더 안다고 효과가 있다고 볼 순 없다. 단기간에 나타난 효과는 신기루와 같다. ‘영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 등 사교육 업계의 주장도 검증되지 않았거나, 한국 현실에 맞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맹 원장=영유아 사교육의 부작용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최근 정신 건강 문제로 상담받는 아이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진흥원에서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접수 신청을 받으면 금세 마감된다. 그만큼 사교육이 아이들의 정서와 발달을 해치고 있다는 의미다.
―영유아 사교육은 최근 갑자기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정부는 왜 이제야 영유아 사교육비 실태조사 등 늑장 대응을 하게 된 걸까.
▽정 공동대표=과도한 학습 압박이 생기면 초등학생만 돼도 ‘나 힘들어요’라고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영유아들은 그렇게 표현하지 못하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사교육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괴로움이 부모들과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김 부위원장=유아교육에 대한 정부의 이해와 관심이 부족했다. 유아교육을 초등 취학 전 준비 단계로만 여기면 선행학습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 부모가 일하는 시간에 아이를 맡아주는 돌봄의 영역으로 생각해 사교육을 스며들게 하는 측면도 있다.
▽맹 원장=사립유치원 등 유아교육의 민간 의존도가 높으니 정부의 관심이 부족하다. 그런 빈틈을 사교육 시장이 파고들었는데, 정부도 적극적으로 손대지 않았던 것이다. 저출생 문제가 심각해지니 그 이유를 들여다보다가, 이제서야 영유아부터 시작되는 사교육 문제를 직시한 것 같다.
―정부 영유아 사교육 대책의 핵심은 공교육이 사교육 수요를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정 공동대표=유치원 등에서 방과 후 과정에 영어·예체능 등 맞춤형 프로그램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취학 전 선행학습은 필수’라는 잘못된 신호를 주는 셈이다. 그동안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은 부모들도 이제는 ‘한글이나 영어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부모들은 지금보다 더 초등 과정을 잘 대비해주거나 특별활동 수가 많은 유치원을 고르려고 할 것이다.
▽김 부위원장=지금도 각 시도교육청에선 과도한 학습 중심 활동은 지양하고, 유아당 하루 한 개 프로그램을 1시간 이내로 진행하도록 지침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현장에선 10개, 20개씩 과목을 늘어놓고 쇼핑하듯 사실상의 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많다. 현 대책대로 방과 후 프로그램을 강화하면 학원에서 받던 사교육이 장소만 유치원으로 바뀌는 것일 뿐 아이들에겐 달라지는 게 없다.
―공교육 기관의 방과 후 프로그램을 활성화해 일반 학원을 덜 찾게 해달라는 부모들도 많다.
▽맹 원장=아이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유치원 등의 방과 후 과정을 학원처럼 국어 영어 수학 중심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방과 후 과정을 확충한다면 아이들이 즐거울 수 있는 활동 중심으로 특성화를 시켜야 한다.
▽김 교수=공교육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는 좋다. 다만 정부가 너무 급하게 대책을 내놓다 보니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방과 후 과정에서 인지 위주의 학습을 안 하더라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필요하다.
―이번 사교육 대책은 실효성이 있을까.
▽정 공동대표=입시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사교육 의존을 낮추긴 어렵다. 정부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 한 해 출생아가 25만 명 이하로 줄었는데, 이들을 계속 경쟁 구도로만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난해 추진하려다 실패한 ‘만 5세 취학’ 정책처럼 현 정부는 아이들을 인생의 주체가 아닌, 국가와 산업계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인재’나 ‘인력’이라는 틀로 바라본다. 교육에 대한 퇴행적인 관점이다. 아이들이 이런 교육 속에서 얼마나 행복한지를 살펴봐야 한다.
▽김 교수=교육부가 어떤 대책을 내놓더라도 사교육 시장은 더 발 빠르게 반응한다. 가령 학원이 유치원, 학교, 스쿨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하니 독일어 ‘슐레(Schule)’를 쓰는 학원들이 생겼다. 영어 키즈카페처럼 다른 유형의 준사교육 시설이 생기는 등 ‘풍선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일회성 정책은 장기적인 효과를 담보하지 못한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목표를 명확하게 하고, 세부 계획을 촘촘히 세워야 한다.
―유아 공교육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까.
▽맹 원장=국가에서 유아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부모들이 공교육 기관을 믿지 못해 사교육을 선택한다면, 더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뢰를 높여야 한다. 시설 등 교육 환경 개선도 필요하다. 좋은 환경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창의성이 발달하고, 행복감도 커진다. 이런 투자가 지속돼야 부모가 믿고 아이를 보낼 수 있다.
▽김 부위원장=유아 교사들이 아이들과 더 깊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학급당 학생 수도 줄여야 한다. 맞벌이하거나 퇴근 시간이 너무 늦어 돌봄을 위해 사교육에 의존하는 부모도 많다. 영유아기 자녀를 둔 부모의 출퇴근 시간 등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노력도 동반돼야 불필요한 사교육을 줄일 수 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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